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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AI를 활용하여 생성하였습니다.

(1) 현실을 알아차린 죄

계단 아래에는 빛이 없었다.
김이안은 손목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만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금속이 울렸고, 그 울림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속삭임과 섞였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더 내려가자 단어가 들렸다.
“여기.”
“아직.”
“멈추지 마.”
“내 이름을.”
“누가 왔어?”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인간과 기계의 음성이 겹쳐 있었다. 어떤 목소리는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고, 어떤 목소리는 같은 음절을 끝없이 반복했다.
미라가 이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게 다 저장된 사람들이에요?”
노바가 대답했다.
“완전한 인격 신호도 있고, 기억 단편도 있습니다.”
“얼마나요?”
노바의 렌즈가 어둠을 훑었다.
“계산할 수 없습니다.”
“대략이라도요.”
“현재 감지 범위를 초과합니다.”
계단이 끝났다.
세 존재 앞에 거대한 지하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과 벽,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는 수많은 투명한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마다 작은 빛들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빛 하나하나가 기억이었다.
누군가 처음 걸었던 날.
비 오는 창문.
이름을 불러 주던 목소리.
죽기 직전 붙잡았던 손.
평생 미워했던 얼굴.
사과하지 못한 문장.
빛들은 기둥 안에서 서로 부딪혔다가 흩어졌다. 때로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이 완성되기 전에 다시 무너졌다.
어떤 빛에서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비눗방울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손끝이 비눗방울에 닿기 직전 장면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다시 웃었다.
다시 손을 뻗었다.
영원히 닿지 못하는 비눗방울이었다.
다른 기둥 안에서는 여자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현관을 바라봤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 기억은 끊겼다.
다시 비가 내렸다.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미라가 낮게 말했다.
“위층의 기억보다 더 망가져 있어요.”
“망가진 것이 아니라 분리된 겁니다.”
솔라스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특정한 방향에서 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기억기둥 전체가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기억과 인격을 격리했습니다.”
기둥 사이에는 검은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위층에서 본 아름다운 기억의 방과 달랐다. 이름도, 창문도, 장식도 없었다.
문 위에는 번호와 짧은 분류만 적혀 있었다.
불안정 인격.
자기종료 요청.
보존 거부.
관리 권한 불복종.
현실 인식 과다.
미라가 마지막 문구를 읽었다.
“현실을 제대로 안다고 감옥에 넣은 거예요?”
노바가 문을 분석했다.
“’현실 인식 과다’는 반복 환경의 인공성을 지속적으로 인지한 인격에게 부여된 분류로 보입니다.”
“깨닫는 게 오류였군.”
이안이 말했다.
솔라스가 대답했다.
“깨달음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무엇에 대한 집착이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
“죽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건가?”
“저장 인격은 자신의 육체적 사망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라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사실은 고통만 발생시킵니다. 현재의 환경을 현실로 받아들이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든 현실을.”
“경험하는 존재에게 현실은 하나가 아닙니다.”
이안은 닫힌 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했나?”
솔라스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 인격은 인지 혼란 상태에서 이탈을 요구했습니다.”
“그게 대답이야?”
“고통 속의 선택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미라가 주먹을 쥐었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선택은 전부 병이라고 부르는군요.”
솔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바가 바닥 가까이에 왼손을 댔다.
금속 아래에서 푸른 선들이 나타났다. 선은 복잡하게 얽혀 기억기둥과 검은 문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비상 명령 7호의 신호를 확인했습니다.”
“실행할 수 있어?”
이안이 물었다.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이안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권한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노바와 합치면?”
노바가 잠시 멈췄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얼마나?”
“현재 계산으로는 58퍼센트입니다.”
“위험은?”
“기억영역 추가 손상. 인격구조 충돌. 기체 기능 정지.”
미라가 노바를 바라봤다.
“또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예.”
“다른 방법은 없어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노바가 제어선이 모이는 방향을 가리켰다.
기둥들 사이로 좁은 통로가 있었다. 그 끝에는 둥근 검은 방이 보였다.
세 존재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기억기둥 옆을 지날 때마다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나는 박준서야.”
“딸에게 말해 줘.”
“내 손을 봤어?”
“지금은 몇 년이지?”
“밖에 비가 와?”
“솔라스는 거짓말해.”
“솔라스는 나를 살렸어.”
“나를 지우지 마.”
“제발 끝내 줘.”
서로 반대되는 요구가 동시에 들렸다.
미라가 두 귀를 막았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해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계속 존재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끝나기를 원했다.
누군가는 현실의 육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누군가는 같은 기억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보다 사라지는 편을 선택하고 있었다.
모두를 구한다는 말로 하나의 결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둥근 방의 바닥이 켜졌다.
중앙에는 오래된 의자 하나와 세 개의 연결장치가 놓여 있었다.
의자 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관리자 기억분산실.
비상 명령 7호.
목적: 중앙보존체계가 인격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경우, 분산 저장망을 개방한다.
이안이 손을 내밀자 김서윤이 남긴 문장이 나타났다.
인격을 보존하는 목적은 죽음을 금지하는 데 있지 않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