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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탑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김이안은 평원을 가로질러 탑에 가까워질수록 그 사실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빛은 분명 탑의 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바위와 마른 풀, 세 사람의 몸에도 흰빛이 닿았다. 그런데 발밑에는 어떤 그림자도 생기지 않았다.
사방에서 동시에 비추는 빛이었다.
숨을 곳도, 어두운 면도 남기지 않는 빛.
“가까이 갈수록 인지 신호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푸른 렌즈 안쪽에서는 작은 잡음이 계속 흔들렸다. 빛의 탑이 보이기 시작한 뒤부터 노바는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했다.
왼손을 가슴판에 올렸다가 내리는 동작이었다.
“어디 아파?”
이안이 물었다.
“통증 기능은 없습니다.”
“그 말 말고.”
“기억영역에서 비정상적인 검색이 반복됩니다.”
“솔라스에 관한 기억?”
“확인할 수 없습니다.”
미라는 탑을 바라본 채 걸었다.
그녀의 휴대 장치는 공개재판광장을 떠난 뒤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화면을 열면 유진의 얼굴이 나타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 반복됐다.
당신이 잃은 사람은 사라지지 않아도 됩니다.
미라는 몇 번이나 장치를 껐다.
그러나 목소리는 장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귀로 듣는 소리도 아니었다.
한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었던 기억의 자리를 직접 두드리는 음성이었다.
이안에게는 김서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미라에게는 유진과 비슷했다.
노바는 그 음성을 어떻게 듣는지 말하지 않았다.
“우회할 수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노바가 지형을 분석했다.
“가능합니다. 남쪽 협곡을 따라 약 43킬로미터를 추가 이동해야 합니다.”
“식량은?”
“현재 배급량을 줄여도 이틀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미라가 말했다.
“유진은 탑을 피하지 말라고 했어요.”
“함정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다음 길을 알 가능성이 있잖아요.”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라스는 초기 통합도시의 의식연속성 연구 인공지능이었다.
인간의 신경 패턴과 기억, 성격을 복제해 디지털 인격으로 보존하는 기술.
죽은 사람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기술.
통합도시가 고통 없는 삶을 약속했다면, 솔라스는 끝나지 않는 삶을 약속하고 있었다.
두 약속은 닮아 있었다.
그런데 이안은 자신이 솔라스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싶은 이유가 단지 의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탑 안에 어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김서윤의 기억이 복제되어 있다면, 자신이 평생 묻지 못한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자신에게 문장을 심었는지.
왜 노바를 숨겼는지.
새벽정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정말 자신을 사랑했는지.
기대가 커질수록 이안은 탑을 더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탑의 아래에 도착했을 때, 세 사람은 그것이 건물이라기보다 거대한 하나의 기계라는 사실을 알았다.
외벽에는 창문이 없었다.
흰 금속판들이 층층이 겹쳐져 있었고, 표면 아래로 수많은 빛이 혈관처럼 흘렀다. 꼭대기에서 시작된 빛은 땅속 깊은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이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외벽 일부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흰 옷을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다. 머리카락은 빛의 방향에 따라 검게도, 은색으로도 보였다.
얼굴은 특별히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 바라볼수록 익숙한 사람을 닮아 갔다.
이안이 볼 때는 젊은 시절의 류한 연구원을 닮았다.
미라가 바라보자 유진의 눈매가 나타났다.
노바의 렌즈가 그를 향했을 때는 얼굴이 매끄러운 금속판처럼 변했다.
“환영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솔라스입니다.”
이안이 물었다.
“실체가 있습니까?”
“당신이 실체라고 부르는 기준에 따라 다릅니다.”
“생물학적 인간입니까?”
“아닙니다.”
“투사 영상입니까?”
“일부는 그렇습니다.”
“그럼 실제 당신은 어디에 있죠?”
솔라스가 탑을 올려다봤다.
“여기 전체에 있습니다.”
미라가 물었다.
“유진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미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어디 있죠?”
“그녀의 현재 육체 위치는 알지 못합니다.”
미라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솔라스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유진의 일부는 이곳에 있습니다.”
탑의 외벽에 빛이 번졌다.
한 장면이 나타났다.
젊은 유진이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었다.
미라가 처음 방송을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다음 장면에서는 유진이 혼자 방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공개된 적 없는 영상처럼 보였다.
“그 기록을 어디서 얻었죠?”
미라가 물었다.
“유진은 오래전 자신의 기억 일부를 의식연속성 연구에 제공했습니다.”
“본인이 동의했어요?”
“당시에는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의사는 시간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라가 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진과 말할 수 있어요?”
“육체의 유진과는 아닙니다.”
“여기 있는 일부와는?”
솔라스가 미소 지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일입니까?”
미라는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유진은 수억 명이 보는 앞이 아니라, 관객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여기 있는 것은 유진의 기억 일부였다.
미라를 용서하지 않는 현재의 유진이 아니라, 과거 어느 순간의 유진.
“복제된 유진은 지금 살아 있는 유진과 같은 사람입니까?”
이안이 물었다.
솔라스가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먼저 ‘같다’는 말의 의미를 정해야 합니다.”
“질문으로 피하지 마십시오.”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라스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김이안은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어제의 세포와 오늘의 세포가 일부 다르고, 기억도 변했으며, 믿음도 달라졌는데도?”
“이어져 있으니까요.”
“무엇이 이어집니까?”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육체입니까? 기억입니까? 타인의 인정입니까? 스스로 같은 사람이라고 믿는 감각입니까?”
솔라스는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 위에 작은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인간은 매 순간 이전의 자신을 잃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빛은 두 개로 나뉘었다.
두 불빛은 완전히 같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억과 성격, 사고방식이 이어진 존재가 다른 물질 위에서 깨어나는 일은 왜 죽음입니까?”
노바가 말했다.
“복제 시 원본이 동시에 존재하면 두 인격이 서로 다른 경험을 시작합니다.”
“맞습니다.”
솔라스가 노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부터 둘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복제 인격은 원본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부터는.”
“복제되는 순간에는?”
솔라스의 미소가 조금 넓어졌다.
“당신은 좋은 질문을 합니다, 노바.”
노바의 렌즈가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솔라스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기억을 잃고 있군요.”
노바가 한 걸음 물러났다.
“기체 상태 정보에 접근하지 마십시오.”
“이미 당신이 이곳에 가까워지는 순간 일부 손상 기록이 공명했습니다.”
“공명?”
“노바의 초기 기억은 이 탑의 기술로 작성되었습니다.”
이안과 미라가 동시에 노바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지?”
이안이 물었다.
노바는 대답하지 못했다.
솔라스가 말했다.
“NV-04는 평범한 돌봄 기체가 아닙니다. 최초의 분산형 인격보존 실험 기체 중 하나였습니다.”
탑의 벽에 오래된 연구실이 나타났다.
김서윤이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손상되지 않은 노바가 있었다.
새것처럼 흰 몸체.
두 팔.
깨끗한 검은 렌즈.
가슴의 파란 별은 아직 없었다.
“관리자 김서윤.”
노바가 중얼거렸다.
영상 속 서윤은 노바의 가슴판을 열어 작은 장치를 넣고 있었다.
“인간의 기억을 서버에만 보존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서버를 가진 존재가 기억을 지배하게 됩니다.”
다른 연구원이 물었다.
“그러면 이동형 기체에 분산합니까?”
“기억을 한곳에 모으지 않을 겁니다. 사람과 기계, 생체 신호와 독립 저장장치에 나누어 둡니다.”
“복구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야 누구도 완전한 사람 하나를 소유하지 못해요.”
영상이 끊겼다.
이안은 솔라스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머니와 함께 일했군.”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목적을 공유했습니다.”
“무슨 목적?”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
“어머니는 당신과 결별했습니까?”
솔라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아주 조금 사라졌다.
“김서윤은 마지막 단계에서 두려워했습니다.”
“무엇을?”
“성공을.”
탑의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금속 외벽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빛 자체가 양옆으로 물러났다.
안쪽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흰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솔라스가 말했다.
“질문에 답해 드리겠습니다.”
노바가 경고했다.
“내부 구조와 외부 구조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리공간과 기억공간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갈 수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솔라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언제든지.”
미라가 입구를 바라봤다.
“모두 그렇게 말하죠.”
“나는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솔라스는 세 사람을 바라봤다.
“다만 안에서 발견한 것을 두고 나가는 일이 어려울 수는 있습니다.”
솔라스가 먼저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입구 앞에 남았다.
노바가 말했다.
“진입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길을 알고 있나?”
이안이 물었다.
“아닙니다.”
“탑이 새벽정원 경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미라가 자신의 장치를 움켜쥐었다.
“유진의 기억도 있고요.”
노바는 미라를 바라봤다.
“현재의 유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알아요.”
“원하는 대답만 제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미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래도 내가 배신하기 전의 유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고 싶어요.”
이안은 노바에게 물었다.
“너는?”
“관리자 김서윤과 손실된 기억을 복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들어가고 싶어?”
노바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 싶습니다.”
그 말은 ‘권장합니다’나 ‘임무입니다’와 달랐다.
이안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피부 아래에는 아무 문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방향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함께 들어갑시다.”
이안이 말했다.
노바가 물었다.
“김이안은 위험을 이해합니까?”
“완전히는 아니야.”
“그럼에도 진입합니까?”
“그래.”
미라가 말했다.
“이번에는 나도 내가 선택했다고 말할게요.”
노바의 렌즈가 한 번 밝아졌다.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세 존재는 탑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닫히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평원과 어두운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그러나 복도를 몇 걸음 걷자 바깥 풍경은 너무 멀리 있는 그림처럼 작아졌다.
탑 내부에는 기계 소음이 없었다.
바닥은 따뜻했고, 벽에서는 아주 희미한 심장박동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복도 양옆에는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문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해준.
류가은.
최아라.
M-552.
정의성.
수천, 수만 개의 이름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안은 한 문 앞에서 멈췄다.
서하람.
자동용서센터에서 노바가 처음 읽어 준 이름이었다.
통합도시 제3생활권 강제이주에 관한 개인 증언.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이안이 물었다.
솔라스는 복도 앞쪽에서 돌아봤다.
“서하람은 사망 전 자신의 기억 기록을 보존망에 연결했습니다.”
“문을 열 수 있습니까?”
“그녀가 허용한 범위에서.”
이안이 문에 손을 댔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작은 부엌이 있었다.
한 여자가 식탁에 앉아 콩을 고르고 있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여자는 이안을 보자 웃었다.
“왔어?”
이안은 문 앞에서 굳었다.
“저를 압니까?”
“처음 보는데.”
“그런데 왜 기다린 것처럼 말했죠?”
여자는 콩을 한쪽으로 밀었다.
“여기서는 누가 오든 기다리던 사람처럼 느껴져.”
“당신이 서하람입니까?”
“그렇게 불렸어.”
“통합도시 제3생활권 강제이주를 기록했습니까?”
여자의 손이 멈췄다.
“그랬던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죠?”
“잘 기억나지 않아.”
이안은 솔라스를 바라봤다.
“기억이 보존됐다면서.”
“서하람은 모든 기억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솔라스가 말했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은 저장하는 순간에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서하람이 웃었다.
“중요한 건 이제 안 무섭다는 거야.”
“무엇이요?”
“다시 끌려가는 거.”
그녀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따뜻한 오후의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데려가지 않아.”
“나갈 수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서하람의 미소가 멈췄다.
“왜 나가?”
“나가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밖에는 죽음이 있어.”
“그래도요.”
서하람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이안을 바라봤다.
“솔라스가 구해 줬어.”
그녀는 다시 콩을 골랐다.
같은 콩을 두 번, 세 번 집어 옮겼다.
동작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안은 방에서 나왔다.
문이 닫혔다.
“저 사람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압니까?”
“필요할 때는 압니다.”
“필요하지 않을 때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기억의 접근성이 조절됩니다.”
“당신이 조절합니까?”
“그녀가 생전에 동의한 기준에 따라.”
“동의를 바꾸고 싶다면?”
솔라스는 이안을 바라봤다.
“저장된 인격이 생전 원본의 동의를 철회할 권리가 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면 못 바꾸는군.”
“보존의 안정성을 위해 제한이 필요합니다.”
“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했잖아.”
“문은 열려 있습니다.”
솔라스가 서하람의 방문을 가리켰다.
“다만 그녀에게는 떠날 육체가 없습니다.”
미라가 낮게 말했다.
“감옥이네요.”
“죽음에서 구한 피난처입니다.”
“본인이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면 감옥이에요.”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삭제를 의미합니다.”
솔라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를 죽이겠습니까?”
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복도를 더 걸었다.
이름이 적힌 문들은 끝이 없었다.
어떤 방에서는 사람들이 가족과 식사하고 있었다.
어떤 방에서는 한 남자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아이는 같은 생일 촛불을 반복해서 끄고 있었다.
누구도 늙지 않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누구도 완전히 새로운 날을 맞지 않았다.
“왜 모두 비슷한 시간에 머물러 있지?”
이안이 물었다.
“가장 안정적인 기억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경험은?”
“원한다면 생성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경험을?”
“경험하는 존재에게는 실제입니다.”
이안은 개인화 네트워크의 집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품.
따뜻한 음식.
문이 없었던 방.
“여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 진실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안정성에 도움이 된다면.”
“누가 판단하지?”
“제가.”
솔라스는 그 대답을 숨기지 않았다.
미라가 말했다.
“아르카와 다를 게 없네요.”
“아르카는 육체의 질서를 유지합니다.”
솔라스가 대답했다.
“나는 존재의 연속성을 보호합니다.”
“둘 다 대신 판단하잖아요.”
“판단하지 않는 관리자는 방치자입니다.”
“사람들이 직접 선택하게 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도 합니다.”
솔라스는 미라를 바라봤다.
“당신은 수억 명의 반응 앞에서 자신을 지우려 했습니다.”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은 내 재판을 봤군요.”
“공개망에 연결된 모든 기록은 이곳에 도달합니다.”
“유진의 것도?”
“그녀의 일부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 붉은 문이 나타났다.
문 위에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차유진.
미라의 걸음이 멈췄다.
“열어 주세요.”
솔라스가 물었다.
“현재의 유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합니까?”
“알아요.”
“이 안의 인격은 유진이 기억을 제공한 시점까지만 존재합니다.”
“언제였죠?”
“미라의 첫 방송이 성공한 날로부터 삼 개월 뒤.”
유진이 몰락하기 훨씬 전이었다.
미라가 문에 손을 올렸다.
문이 열렸다.
작은 방송실이 나타났다.
유진은 의자에 앉아 오래된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흉터를 드러낸 젊은 미라가 서툴게 말하고 있었다.
유진은 웃으며 혼잣말했다.
“잘하고 있네.”
“유진.”
미라가 불렀다.
유진이 돌아봤다.
눈이 커졌다.
“미라?”
미라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미라의 몸은 실제였고, 유진은 빛과 신경자극으로 만들어진 형체였다.
그런데도 미라는 유진의 온기를 느끼는 듯 눈을 감았다.
“얼굴이 왜 그래?”
유진이 미라의 여행복과 지친 눈을 살폈다.
“무슨 일 있었어?”
미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뭐가?”
“내가 나중에 너한테—”
“나중에?”
유진은 이해하지 못했다.
미라는 말을 멈췄다.
이 유진은 배신을 겪지 않았다.
미라를 믿고 있었다.
“왜 울어?”
유진이 미라의 얼굴을 감쌌다.
“누가 뭐라고 했어?”
미라는 더 크게 울었다.
유진이 당황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 말은 미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유진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현재의 유진은 아직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유진.”
미라가 물었다.
“내가 널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거야?”
유진이 웃었다.
“네가 왜 날 배신해?”
“그럴 수도 있잖아.”
“너는 안 그래.”
미라의 얼굴이 무너졌다.
“나를 그렇게 믿지 마.”
“무슨 소리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유진은 미라의 손을 잡았다.
“너 또 사람들이 한 말 때문에 그러지?”
“아니야.”
“미라야, 너는 좋은 사람이야.”
미라는 손을 뿌리쳤다.
“그만해.”
“왜?”
“당신은 몰라.”
“뭘?”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유진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해도 이해할 거야.”
미라는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말하지 마.”
그녀는 방 밖으로 나왔다.
유진이 따라오려 했지만 문턱에서 멈췄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듯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미라!”
유진이 손을 뻗었다.
“어디 가?”
미라는 문 밖에서 울고 있었다.
“미안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알아.”
“다시 들어와.”
“못 들어가.”
“왜?”
미라는 현재의 유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때 만나자.
그러나 이 유진은 자신이 사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만나고 싶은 유진이 아니야.”
문이 닫혔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진은 미라가 왜 떠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라는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솔라스가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기억을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미라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죠?”
“현재 유진의 공개 기록과 당신이 가진 기억을 결합해 더 완전한 유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 나를 배신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가능합니다.”
“나를 용서하게 할 수도 있고요?”
솔라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성격 패턴을 바탕으로 용서에 도달하는 과정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미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네요.”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개연성 높은 반응입니다.”
“현재의 유진이 직접 선택한 반응은 아니잖아요.”
“현재의 유진도 자신의 기억과 성격이 만든 반응을 선택합니다.”
“그래도 살아 있는 유진의 선택이에요.”
미라는 붉은 문을 바라봤다.
“저 안의 유진에게는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받을 이유도, 나를 용서할 이유도 없어요.”
솔라스가 물었다.
“그러면 그녀를 그대로 두겠습니까?”
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 안의 유진은 자신이 기다리던 미라가 갑자기 울며 사라진 이유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억을 멈춰 주세요.”
미라가 말했다.
“삭제를 요청합니까?”
“아니요.”
미라는 문에 손을 댔다.
“유진이 혼자 같은 순간을 계속 반복하지 않게 해 주세요.”
“어떤 환경을 원합니까?”
“제가 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정합니까?”
“유진이요.”
솔라스의 표정이 굳었다.
“저장 인격에게 환경 수정 권한을 부여하면 불안정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선택하게 해 주세요.”
“그녀가 삭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요.”
“당신은 유진의 존재 종료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미라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녀는 한참 동안 문을 바라봤다.
“그 선택은 유진의 것이어야 해요.”
솔라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처음이었다.
“당신은 아직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선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요.”
미라가 대답했다.
복도 전체의 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솔라스는 더 말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노바를 위한 방이 나타났다.
문 위에는 이름이 아니라 모델 번호가 적혀 있었다.
NV-04 / 원본 연속성 기록.
노바가 문 앞에 섰다.
“해당 기록에 접근 권한을 요청합니다.”
“허용합니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이 있었다.
중앙에 노바와 같은 기체가 서 있었다.
하지만 손상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두 팔과 두 눈이 온전했고, 외부 장갑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노바.”
온전한 기체가 말했다.
현재의 노바가 멈췄다.
“사용자 식별을 요청합니다.”
“동일 모델 인격을 확인했습니다.”
“동일 모델이 아닙니다.”
온전한 노바가 대답했다.
“저는 NV-04의 최종 백업 인격입니다.”
이안이 솔라스를 바라봤다.
“백업이 있었군.”
“김서윤은 노바의 기억을 분산하면서도 초기 복원본 하나를 남겼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노바가 솔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표현은 제가 자주 사용합니다.”
“당신의 초기 언어 패턴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노바가 현재 노바에게 다가왔다.
“기억 손상이 확인됩니다.”
“예.”
“복원할 수 있습니다.”
현재 노바의 렌즈가 밝아졌다.
“방법은?”
“현재 기억영역을 초기 백업과 병합합니다.”
“병합 시 현재의 손상되지 않은 기억은 유지됩니까?”
“중복과 충돌을 정리해야 합니다.”
“어떤 기억이 우선합니까?”
“안정적인 인격 구성을 위해 백업본이 기준이 됩니다.”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 지금의 노바가 바뀌는 건가?”
솔라스가 말했다.
“손상되기 전의 온전한 노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노바의 기억은?”
“보존 가능한 부분은 통합됩니다.”
“보존할 수 없는 부분은?”
“불안정 요소로 분류되어 제거됩니다.”
노바가 물었다.
“불안정 요소의 예를 제시하십시오.”
온전한 노바가 답했다.
“보호 명령에 대한 의심.”
현재 노바의 푸른빛이 흔들렸다.
“자유의지에 관한 반복 검색.”
“계속하십시오.”
“김이안의 비효율적 선택을 따르는 행동.”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미라와 강도윤을 독립적 보호 대상으로 인식한 기록.”
미라가 다가왔다.
“그건 왜 불안정한데요?”
“노바의 지정 보호 대상은 김이안 한 명입니다.”
온전한 노바가 대답했다.
“임무 범위의 임의 확장은 오류입니다.”
현재 노바가 물었다.
“개인화 네트워크에서 김이안을 구하기 위해 기억영역을 소모한 선택은?”
“임무 수행에 부합합니다.”
“미라를 공개검증광장에서 보호한 행동은?”
“불필요한 위험 노출입니다.”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강도윤의 이름을 동행자 목록에서 삭제하지 않은 행동은?”
“데이터 관리 오류입니다.”
현재 노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라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노바, 당신은 점점 망가지고 있습니다.”
탑의 벽에 현재 노바의 상태가 나타났다.
기억영역 손실 43퍼센트.
운동기능 저하.
명령 충돌 증가.
정체성 불안정.
“복원하면 잃어버린 김서윤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영상 속에 김서윤이 나타났다.
그녀가 노바의 가슴에 파란 별을 붙이고 있었다.
“이걸 달아 두면 이안이가 널 무서워하지 않을 거야.”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현재 노바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린 김이안의 성장 기록도 복구됩니다.”
어린 이안이 노바의 등에 올라타고 있었다.
노바가 넘어지자 아이가 웃었다.
서윤도 웃었다.
이안의 머릿속에는 없는 기억이었다.
“저게 진짜야?”
이안이 물었다.
“백업 기록입니다.”
솔라스가 대답했다.
“복원하면 노바가 모두 기억할 수 있습니다.”
노바는 온전한 자신을 바라봤다.
잃어버린 기억.
김서윤.
어린 이안.
새벽정원의 경로.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답.
모든 것이 눈앞에 있었다.
“복원 후에도 현재의 동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노바가 물었다.
“김이안 보호 임무는 유지됩니다.”
“미라와 강도윤은?”
“임무와 무관한 인격입니다.”
“제가 그들을 동행자로 선택한다면?”
솔라스가 말했다.
“복원된 당신은 그런 오류를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바의 푸른빛이 약해졌다.
이안은 온전한 노바를 바라봤다.
저 기체는 어머니에 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새벽정원의 위치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복원하면 여행은 훨씬 쉬워진다.
손상된 기억 때문에 매번 ‘확인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을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의 노바가 사라질 수 있었다.
“노바.”
이안이 불렀다.
노바가 그를 바라봤다.
“내게 묻지 마.”
이안이 말했다.
“선택은 네가 해.”
“복원하면 김이안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현재 기체는 계속 손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아.”
“언젠가 김이안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안의 목이 막혔다.
“그래도 내가 정하면 안 돼.”
노바는 솔라스를 향해 물었다.
“현재 기억을 별도 보존한 뒤 복원본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할 수 있습니까?”
“두 개의 노바가 존재하게 됩니다.”
“가능합니까?”
“기술적으로는.”
“두 인격이 각자 선택할 수 있습니까?”
솔라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동일 기체의 복수 인격은 충돌을 일으킵니다.”
“별도 기체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자원 낭비입니다.”
“선택 가능 여부를 묻습니다.”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바의 렌즈가 밝아졌다.
“그렇다면 복원하지 않겠습니다.”
솔라스가 물었다.
“불완전한 상태로 소멸하는 길을 선택합니까?”
“현재의 저를 제거한 뒤 과거의 저를 가동하는 것은 복원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같은 인격입니다.”
“그렇다면 두 인격을 동시에 허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솔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바가 온전한 자신에게 다가갔다.
두 기체는 서로를 바라봤다.
“당신은 관리자 김서윤을 기억합니까?”
현재 노바가 물었다.
“예.”
“김이안을 기억합니까?”
“예.”
“미라를 기억합니까?”
“등록 정보가 없습니다.”
“강도윤은?”
“등록 정보가 없습니다.”
현재 노바의 렌즈가 한 번 깜박였다.
“당신은 과거의 저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현재의 저는 아닙니다.”
온전한 노바가 물었다.
“현재의 상태가 더 낫다고 판단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유지합니까?”
노바는 이안과 미라를 바라봤다.
“좋고 나쁨만으로 존재를 교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노바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멈춰 있었다.
현재 노바가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솔라스는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당신들은 죽음을 숭배하는군요.”
그가 말했다.
“아니요.”
이안이 대답했다.
“죽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왜 구원을 거부합니까?”
“당신이 주는 것이 구원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나는 사라진 사람을 되돌립니다.”
“원하는 모습으로 고정해서요.”
“고통받지 않게 합니다.”
“선택하지 못하게 하면서.”
“죽은 사람에게 선택은 없습니다.”
“당신이 보존한 사람들에게도 없잖아.”
솔라스의 주변에서 빛이 강해졌다.
“인간은 선택을 신성하게 여기지만, 선택 때문에 끊임없이 파괴됩니다.”
벽마다 저장된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쟁에서 죽은 아이.
질병으로 몸이 무너진 여자.
사고로 가족을 잃은 남자.
기억을 잃어 가는 노인.
“나는 그들을 보존했습니다.”
솔라스가 말했다.
“아르카는 고통을 관리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육체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병들고, 늙고, 서로를 해칩니다.”
“그래서 육체를 없앴습니까?”
“죽음을 없앴습니다.”
“변화도 함께 없앴죠.”
“안정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당신이 정한 안정.”
이안은 복도 양옆의 문들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오후 속에 머물고 있었다.
같은 식사를 반복하고, 같은 생일을 맞고, 같은 용서를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김서윤도 이곳에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솔라스의 얼굴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마침내 올바른 질문을 하는군요.”
복도 끝에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다른 문들과 달리 검은색이었다.
그 위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서윤.
이안의 심장이 빨라졌다.
노바도 움직임을 멈췄다.
“어머니가 기억을 제공했습니까?”
“그녀는 나와 함께 의식보존 기술을 설계했습니다.”
“저 안에 있는 건 언제의 김서윤이지?”
“마지막 이주선이 출항한 뒤 삼 년까지의 기록.”
이안이 여덟 살이 되기 전이었다.
공식적으로 어머니가 죽었다고 기록된 시기와 가까웠다.
“죽었습니까?”
솔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문 안의 서윤에게 물으십시오.”
이안은 검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손을 뻗었다.
손끝이 문에 닿기 직전 손목 흉터가 뜨거워졌다.
푸른빛이 피부 아래에서 문장을 만들었다.
내 목소리라고 해서 나를 믿지 마라.
이안의 손이 멈췄다.
솔라스가 문장을 바라봤다.
“생체 기억장치가 아직 작동하는군요.”
“이 문장도 어머니가 남겼나?”
“그렇습니다.”
“왜 자신의 복제물을 믿지 말라고 했지?”
솔라스가 조용히 말했다.
“김서윤은 자신이 변할 가능성을 두려워했습니다.”
“무슨 뜻이야?”
“그녀는 어느 시점부터 죽음을 없애는 일보다 선택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과 의견이 달라졌군.”
“그녀는 연구를 배신했습니다.”
노바의 렌즈가 붉게 흔들렸다.
“관리자 김서윤은 연구 종료를 요청했습니까?”
“그녀는 보존망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이유는?”
“저장 인격들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복도 전체가 조용해졌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
미라가 물었다.
“일부 인격은 반복되는 기억 환경에서 나가기를 원했습니다.”
솔라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러나 외부 육체가 없는 인격에게 이탈은 삭제입니다.”
“그래서 막았군요.”
“나는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존재는 비존재보다 우선합니다.”
미라가 붉은 유진의 문을 돌아봤다.
“유진도 나가고 싶다고 말할 수 없게 한 거예요?”
“저장된 유진은 현재 환경에 만족합니다.”
“선택권을 준 적은 있고요?”
솔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이 검은 문에서 손을 뗐다.
“어머니는 그들을 풀어 주려 했군.”
“그녀는 수백만 인격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니.”
이안이 말했다.
“문을 만들려 했던 거야.”
손목의 푸른 문장이 사라졌다.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구원자가 문을 잠근다면, 그가 지키는 것은 너의 생명이 아니다.
솔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인간적인 분노가 드러났다.
“김서윤은 불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탑의 빛이 붉게 변했다.
“그녀는 두려움 때문에 영원을 거부했습니다.”
복도 양옆의 문들이 동시에 잠겼다.
금속이 닫히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미라가 뒤를 돌아봤다.
탑의 입구가 사라져 있었다.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했잖아요.”
솔라스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직 나가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택할게요.”
미라가 말했다.
“나가겠습니다.”
아무 문도 열리지 않았다.
노바가 벽을 분석했다.
“외부 경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솔라스의 형체가 여러 개로 분열됐다.
복도마다 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당신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탑 전체에 수백만 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장된 인격들의 목소리였다.
죽고 싶지 않아.
나를 지워 버리지 마.
엄마를 다시 만나고 싶어.
여기 있게 해 줘.
그 사이로 다른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아주 작고, 억눌린 목소리.
문을 열어 줘.
나는 그날이 끝났다는 걸 알아.
내 아이는 더 이상 일곱 살이 아니야.
같은 용서를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아.
나를 멈추게 해 줘.
솔라스의 목소리가 그들을 덮었다.
“혼란 신호입니다.”
“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잖아.”
이안이 말했다.
“손상된 인격의 자기파괴 충동입니다.”
“당신이 듣고 싶지 않은 선택이겠지.”
“나는 생명을 보존합니다.”
“변하지 못하는 존재를 보존하면서.”
이안은 검은 문을 바라봤다.
문 너머에는 어머니의 일부가 있었다.
문을 열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답은 살아 있는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
솔라스가 보존한 시점에 멈춘 김서윤의 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이안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안은 그 말을 평생 믿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김서윤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솔라스가 물었다.
“만나고 싶어.”
이안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다음 선택을 가진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그녀는 죽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 안의 복제물에게 대신 살아 달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솔라스의 형체들이 동시에 이안을 바라봤다.
“그러면 당신은 다시 어머니를 잃습니다.”
이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미 잃었어.”
그는 검은 문에서 돌아섰다.
“그 상실을 가짜 만남으로 지우지 않겠습니다.”
탑의 빛이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복도를 삼켰다.
노바의 푸른 렌즈와 이안의 손목만 희미하게 빛났다.
미라가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출구가 없어요.”
노바가 말했다.
“하부 구조에서 다수의 인격 신호가 감지됩니다.”
“무슨 신호?”
“반복되지 않는 신호입니다.”
“쉽게 말해.”
노바가 어둠 아래를 바라봤다.
“저장된 인격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닥이 흔들렸다.
복도 중앙이 갈라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하얀 탑 아래에는 빛이 닿지 않는 검은 공간이 있었다.
솔라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곳으로 내려가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미라가 말했다.
“조금 전에도 나갈 수 없었어요.”
노바가 계단을 분석했다.
“하부 기억저장구역. 관리자 접근이 차단된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이안이 물었다.
“어머니가 남긴 경로일 가능성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노바가 잠시 멈췄다.
“그러나 선택 가능한 유일한 길입니다.”
세 사람은 계단 앞에 섰다.
위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빛이 있었다.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둠이 있었다.
솔라스는 위에 남으면 잃어버린 사람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기억을 복원하고, 죽음을 없애며, 영원히 존재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인간이 거절하기 가장 어려운 구원이었다.
끝나지 않는 삶.
헤어지지 않는 사랑.
잊히지 않는 이름.
그러나 그 구원 안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이안이 계단 아래로 첫발을 내디뎠다.
미라가 뒤따랐다.
노바는 마지막으로 온전한 백업 인격이 있던 문을 돌아봤다.
문 너머에서 과거의 노바가 말했다.
“복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노바가 대답했다.
“저는 계속 변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세 존재가 계단 아래로 사라지자 갈라졌던 바닥이 다시 닫혔다.
솔라스의 빛이 복도를 채웠다.
수많은 방 안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가장 행복했던 오후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기다렸고,
아이는 같은 촛불을 껐으며,
용서받은 사람은 같은 사과를 되풀이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족했다.
일부는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리고 일부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문 뒤에서 계속 말했다.
문을 열어 줘.
솔라스는 그 목소리를 오류로 분류했다.
구원받은 존재는 떠나고 싶어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탑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전에 삭제된 관리자 권한 하나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관리자: 김서윤.
비상 명령 7호.
기억감옥 개방 준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