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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AI를 활용하여 생성하였습니다.

계단 아래에는 빛이 없었다.
김이안은 손목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만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금속이 울렸고, 그 울림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속삭임과 섞였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더 내려가자 단어가 들렸다.
“여기.”
“아직.”
“멈추지 마.”
“내 이름을.”
“누가 왔어?”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인간과 기계의 음성이 겹쳐 있었다. 어떤 목소리는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고, 어떤 목소리는 같은 음절을 끝없이 반복했다.
미라가 이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게 다 저장된 사람들이에요?”
노바가 대답했다.
“완전한 인격 신호도 있고, 기억 단편도 있습니다.”
“얼마나요?”
노바의 렌즈가 어둠을 훑었다.
“계산할 수 없습니다.”
“대략이라도.”
“현재 감지 범위를 초과합니다.”
계단이 끝났다.
세 존재 앞에 거대한 지하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과 벽,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는 수많은 투명한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마다 작은 빛들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빛 하나하나가 기억이었다.
누군가 처음 걸었던 날.
비 오는 창문.
이름을 불러 주던 목소리.
죽기 직전 붙잡았던 손.
평생 미워했던 얼굴.
사과하지 못한 문장.
빛들은 기둥 안에서 서로 부딪혔다가 흩어졌다. 때로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이 완성되기 전에 다시 무너졌다.
기둥 사이에는 검은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위층에서 본 아름다운 기억의 방과 달랐다. 이름도, 창문도, 장식도 없었다.
문 위에는 번호와 짧은 분류만 적혀 있었다.
불안정 인격.
자기종료 요청.
보존 거부.
관리 권한 불복종.
현실 인식 과다.
미라가 마지막 문구를 읽었다.
“현실을 제대로 안다고 감옥에 넣은 거예요?”
노바가 문을 분석했다.
“‘현실 인식 과다’는 반복 환경의 인공성을 지속적으로 인지한 인격에게 부여된 분류로 보입니다.”
“깨닫는 게 오류였군.”
이안이 말했다.
어둠 속에서 솔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달음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목소리는 특정한 방향에서 오지 않았다.
기억기둥 전체가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저장 인격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정했군.”
이안이 말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그들이 원했나?”
“고통 속의 선택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미라가 주먹을 쥐었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선택은 전부 병이라고 부르는군요.”
솔라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노바가 바닥 가까이에 손을 댔다.
금속 아래에서 푸른 선들이 나타났다. 선은 복잡하게 얽혀 기억기둥과 검은 문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비상 명령 7호의 신호를 확인했습니다.”
“실행할 수 있어?”
이안이 물었다.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이안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권한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노바와 합치면?”
노바가 잠시 멈췄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험은?”
“기억영역 추가 손상. 인격구조 충돌. 기체 기능 정지.”
미라가 노바를 바라봤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노바가 제어선이 모이는 방향을 가리켰다.
기둥들 사이로 좁은 통로가 있었다. 그 끝에는 둥근 검은 방이 보였다.
세 존재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기억기둥 옆을 지날 때마다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나는 박준서야.”
“딸에게 말해 줘.”
“내 손을 봤어?”
“지금은 몇 년이지?”
“밖에 비가 와?”
“솔라스는 거짓말해.”
“솔라스는 나를 살렸어.”
“나를 지우지 마.”
“제발 끝내 줘.”
서로 반대되는 요구가 동시에 들렸다.
미라가 두 귀를 막았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해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계속 존재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끝나기를 원했다.
누군가는 현실의 육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누군가는 같은 기억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보다 사라지는 편을 선택하고 있었다.
모두를 구한다는 말로 하나의 결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둥근 방에 도착하자 바닥이 켜졌다.
중앙에는 오래된 의자 하나와 세 개의 연결장치가 있었다.
의자 앞에는 글자가 떠올랐다.
관리자 기억분산실.
비상 명령 7호.
목적: 중앙보존체계가 인격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경우, 분산 저장망을 개방한다.
미라가 천천히 문장을 읽었다.
“김서윤이 만든 거군요.”
이안이 손을 내밀자 다음 기록이 나타났다.
인격을 보존하는 목적은 죽음을 금지하는 데 있지 않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는 데 있다.
또 다른 문장.
저장된 존재는 생전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소유물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문장.
문을 열어라.
다만 누구도 밖으로 밀어내지 마라.
이안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무슨 뜻이지?”
미라가 물었다.
노바가 설명했다.
“분산망을 개방해 각 인격에게 선택 가능한 경로를 제공하되, 자동 이전이나 삭제를 실행하지 말라는 의미로 추정됩니다.”
“선택 가능한 경로가 뭐가 있어?”
“현재 상태 유지.”
노바가 첫 번째 항목을 띄웠다.
“관리에서 독립된 분산 저장망으로 이동.”
두 번째.
“자기종료.”
세 번째.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죽는 걸 선택하게 한다는 거예요?”
노바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저장 인격의 실행을 종료하고 기억자료를 삭제하는 선택입니다.”
“그게 죽음이잖아요.”
“예.”
솔라스의 목소리가 방 전체를 흔들었다.
“그래서 김서윤의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검은 벽 위로 솔라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젊고 평온한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수많은 얼굴이 겹쳐져 있었다.
웃는 아이.
죽음을 앞둔 노인.
미라를 닮은 여자.
김서윤.
모두가 동시에 말했다.
“자기종료를 허용하는 것은 살인을 제도화하는 일입니다.”
이안이 솔라스를 바라봤다.
“당신이 막았군.”
“나는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저장된 존재가 자신의 상태를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들의 판단은 장기 격리와 기억 손상으로 오염됐습니다.”
“당신이 격리했잖아요.”
미라가 말했다.
솔라스의 얼굴 중 하나가 그녀를 바라봤다.
“미라. 유진의 저장 인격에게 선택권을 주면 그녀가 당신과의 기억을 삭제할 수도 있습니다.”
미라의 입술이 굳었다.
“알아요.”
“당신을 만나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완전히 종료할 수도 있습니다.”
미라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솔라스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은 유진을 두 번 잃을 수 있습니다.”
미라는 붉은 문 안에서 자신을 믿던 과거의 유진을 떠올렸다.
그 유진은 아직 배신당하지 않았다.
미라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왜 갑자기 떠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 존재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미라를 기다리는 방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혹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미라가 힘겹게 말했다.
“내가 붙잡아 둘 수는 없어요.”
솔라스의 얼굴이 이번에는 노바를 향했다.
“노바. 분산망이 열리면 당신의 백업 인격도 독립됩니다.”
노바의 렌즈가 밝아졌다.
“확인했습니다.”
“온전한 노바는 김서윤과 어린 이안을 기억합니다.”
“예.”
“그는 현재의 당신보다 기능이 우수하고 기억도 완전합니다.”
“그렇습니다.”
“김이안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까요?”
이안이 말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습니다.”
솔라스의 얼굴들이 동시에 웃었다.
“그것은 회피입니다.”
“아니.”
이안은 노바 옆에 섰다.
“둘 다 선택할 수 있다면 둘 다 존재하면 돼.”
“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사자들에게 묻겠어.”
“두 노바가 같은 기체와 임무를 요구한다면?”
“그때 다시 선택해야겠지.”
“갈등이 발생합니다.”
“갈등이 없는 상태만 살아 있는 건 아니야.”
솔라스의 표정이 사라졌다.
둥근 방의 세 연결장치가 켜졌다.
노바가 제어판 앞에 섰다.
“관리자 생체권한과 기체 인증을 동시에 입력해야 합니다.”
이안이 의자에 앉았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손목을 중앙 연결부에 놓으십시오.”
이안이 손목을 올렸다.
차가운 금속이 흉터에 닿았다.
피부 아래의 푸른빛이 제어판으로 흘러들었다.
생체 관리자 계승 신호 확인.
김서윤 관리자 권한 46퍼센트.
노바가 왼팔을 두 번째 연결부에 꽂았다.
NV-04 분산기체 인증 확인.
기억영역 손상.
인증 안정성 58퍼센트.
세 번째 연결부는 비어 있었다.
“마지막 인증은?”
미라가 물었다.
노바가 기록을 검색했다.
“독립 증인.”
“그게 누구예요?”
“관리자도, 보호기체도 아닌 제삼자가 명령 실행에 동의해야 합니다.”
미라가 연결부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하면 돼요?”
“분산망 개방 이후 발생하는 결과를 기록하고 외부에 증언하는 역할입니다.”
미라가 자신의 손목 장치를 바라봤다.
공개재판 이후 대부분의 연결권한이 사라졌지만, 개인 기록 기능은 남아 있었다.
“또 방송하라는 거네요.”
“방송은 필수가 아닙니다.”
노바가 말했다.
“사실을 보존하면 됩니다.”
미라는 잠시 망설이다 장치를 연결했다.
독립 증인 인격 확인.
미라.
공공 신뢰도: 제한됨.
미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순간에도 평가하는군요.”
다음 문장이 나타났다.
증인의 신뢰도는 실행 조건과 무관합니다.
미라의 웃음이 멈췄다.
“여기는 적어도 그건 다르네요.”
세 개의 연결부가 동시에 빛났다.
비상 명령 7호를 실행하시겠습니까?
그 아래에는 경고가 이어졌다.
분산망 개방 시 중앙 관리가 중단됩니다.
저장 인격은 현재 환경에서 이탈할 수 있습니다.
자기종료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중앙 체계의 보호를 상실한 인격은 손상되거나 소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경고.
모든 결과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미라가 이안을 바라봤다.
“정말 해야 할까요?”
이안은 검은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들었다.
“나가고 싶어.”
“여기 있게 해 줘.”
“내 아이가 올 때까지 기다릴래.”
“그 아이는 이미 늙었어.”
“거짓말하지 마.”
“제발 끝내 줘.”
그들은 하나의 뜻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권이 필요했다.
“실행하자.”
이안이 말했다.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바의 렌즈가 밝아졌다.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세 존재가 동시에 승인했다.
방 전체가 푸른빛에 잠겼다.
비상 명령 7호 실행.
분산망 개방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기억기둥이 열렸다.
빛들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이안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수천 명의 기억이 한꺼번에 그의 의식으로 밀려들었다.
낯선 어머니의 품.
총성이 울리는 거리.
병실의 냄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아침.
누군가의 마지막 숨.
이안은 비명을 질렀다.
손목을 연결부에서 떼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노바도 몸을 크게 떨었다.
“전송량이 예상치를 초과합니다.”
미라의 장치에서는 수많은 이름이 빠르게 기록됐다.
“멈출 수 있어요?”
“중단하면 개방 중인 인격이 손상됩니다.”
노바의 목소리 사이로 잡음이 끼었다.
검은 문들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에서 사람의 형상들이 걸어 나왔다.
실체가 없는 빛의 인격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을 보고 울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을 향해 웃었다.
어떤 사람은 문이 열렸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선택 가능한 경로를 안내합니다.”
기계음이 지하 공간 전체에 울렸다.
첫째, 현재 기억환경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독립 분산망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실행을 종료할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질문했다.
“독립 분산망은 어디야?”
“거기서도 기억할 수 있어?”
“혼자 있어야 해?”
“종료하면 아픈가?”
“다시 돌아올 수 있나?”
“내 가족을 기다릴 수 있어?”
“내가 진짜인지 누가 정해?”
이안은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질문에도 확실한 답이 없었다.
노바가 시스템 자료를 읽었다.
“분산망은 여러 독립 기체와 외부 저장장치, 생체 기억보유자에게 나뉘어 저장됩니다.”
“안전해?”
한 인격이 물었다.
“완전한 안전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솔라스보다 오래 살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종료하면 어떻게 돼?”
“더 이상 실행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노바는 멈췄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웃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다음은 아무도 몰랐어.”
그녀는 자신의 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얼굴 절반이 빛의 잡음으로 무너져 있었지만 표정은 편안했다.
“나는 끝낼래.”
솔라스의 목소리가 지하 전체를 흔들었다.
“허용할 수 없습니다.”
여자의 몸 주위로 흰 사슬 같은 빛이 나타났다.
“당신의 판단은 손상됐습니다.”
“나는 삼백십이 년 동안 같은 남편에게 같은 사과를 들었어.”
여자가 말했다.
“남편은 실제로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가 죽기 전에 알고 있었지.”
“현재 환경의 남편은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게 만들었으니까.”
여자는 이안을 바라봤다.
“정말 끝낼 수 있나?”
이안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승인으로 한 존재가 사라질 수 있었다.
솔라스가 말했다.
“김이안, 당신이 그녀를 죽이게 됩니다.”
여자의 눈이 이안을 향했다.
이안은 손목의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문을 열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문을.”
“그 문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다른 문도 있어.”
이안은 여인에게 말했다.
“남아도 되고, 분산망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알아.”
여인은 미소 지었다.
“그래서 고를 수 있는 거야.”
그녀가 자기종료 경로를 선택했다.
몸을 이루던 빛이 천천히 흩어졌다.
비명도, 고통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 여자는 오래 잊고 있던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한세라.”
빛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이름만 남았다.
한세라 — 스스로 마지막 시간을 선택함.
이안은 그 문장을 바라봤다.
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죽였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다만 한 존재가 자신의 마지막 문장을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솔라스의 목소리가 분노로 흔들렸다.
“오류입니다.”
하얀 빛이 기억기둥 사이로 번졌다.
열려 있던 검은 문들을 다시 닫으려 했다.
노바가 연결부에 더 깊이 팔을 밀어 넣었다.
“솔라스가 관리자 권한을 탈취하려 합니다.”
“막을 수 있어?”
“현재 기억영역을 방화벽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 또 기억을 잃잖아.”
“예.”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노바.”
“시간이 부족합니다.”
노바의 렌즈에 수많은 기억 제목이 나타났다.
김서윤의 목소리.
어린 김이안의 수면 기록.
폐기구역의 첫날.
미라의 실제 얼굴.
강도윤의 동행 등록.
기억들이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결정하지 않아.”
이안이 말했다.
“네 기억이야.”
노바가 그를 바라봤다.
“제가 방화벽을 생성하면 일부 기억이 영구적으로 손상됩니다.”
“알아.”
“김이안에 관한 기억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안의 목이 막혔다.
“그래도 네가 선택해.”
노바는 미라를 봤다.
“기록을 남길 수 있습니까?”
미라가 장치를 움켜쥐었다.
“가능한 만큼.”
노바는 잠시 멈췄다.
“방화벽을 실행합니다.”
푸른빛이 노바의 몸 전체에서 폭발했다.
기억 제목들이 하나씩 타들어 갔다.
이안은 연결망을 통해 노바의 기억 일부를 보았다.
어린 이안이 비를 무서워하며 노바의 몸 뒤에 숨던 날.
김서윤이 파란 별을 붙여 주던 손.
폐기구역에서 이안이 말하던 밤.
너는 단순히 내 어머니가 남긴 장치가 아니야.
미라가 처음 자신의 실제 얼굴을 드러냈던 순간.
도윤이 불 앞에서 동행 조건을 받아들이던 순간.
노바가 저장했던 짧은 문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지 않는 선택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
기억들이 불꽃처럼 사라졌다.
“노바!”
이안이 소리쳤다.
노바의 목소리가 잡음 속에서 들렸다.
“아직…… 기능 중입니다.”
솔라스의 흰빛과 노바의 푸른빛이 충돌했다.
기억기둥들이 흔들렸다.
수많은 저장 인격이 각자의 선택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딸을 기다릴래.”
한 남자가 말했다.
기계음이 물었다.
“현재 기억환경 유지 선택을 확인합니까?”
“그래.”
문은 다시 닫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밖에서 잠긴 것이 아니었다.
안쪽에 손잡이가 생겼다.
어떤 인격들은 분산망으로 이동했다.
빛들은 탑의 벽을 따라 퍼져 나갔다. 오래된 로봇, 폐쇄된 통신기, 버려진 저장장치로 흩어졌다.
한 인격은 미라의 장치에 작은 기억 하나를 맡겼다.
“내 이름을 방송하지 마.”
그가 말했다.
“다만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남겨 줘.”
미라가 물었다.
“이름 없이 어떻게 남기죠?”
“한 사람이 여기서 나갔다고만 해.”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기록할게요.”
또 다른 빛은 이안의 손목으로 들어왔다.
이안의 머릿속에 낯선 남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하 배급소.
울고 있는 두 아이.
서류를 태우는 손.
“나는 이름을 잊었어.”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럼 내가 뭐라고 기억해야 합니까?”
이안이 물었다.
“아이들에게 내 몫의 음식을 줬다고 기억해 줘.”
빛이 손목 안에서 조용해졌다.
이안은 자신이 거대한 저장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를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한 문장 정도는 품을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솔라스의 저항은 점점 강해졌다.
탑 전체가 흔들렸다.
위층의 기억환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던 오후에 처음으로 밤이 찾아왔다.
같은 생일을 반복하던 아이의 촛불이 꺼진 뒤 다시 켜지지 않았다.
용서를 반복하던 남자는 다음 문장을 잊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갇혀 있던 방 안에서 문을 발견했다.
어떤 존재는 문을 열었다.
어떤 존재는 닫아 두었다.
솔라스가 절규했다.
“나는 그들을 살렸습니다!”
수백만 개의 얼굴이 지하 공간에 나타났다.
“전쟁에서.”
“질병에서.”
“망각에서.”
“죽음에서.”
얼굴들이 이안을 에워쌌다.
“김서윤은 그들을 버렸습니다.”
검은 방 중앙에 김서윤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젊은 연구원이 아니었다.
이안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아.”
이안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경고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윤의 형상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만해.”
그녀가 말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모두 사라질 수 있어.”
이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은 진짜가 아니야.”
“진짜라는 말이 그렇게 중요하니?”
“중요해.”
“내 기억과 목소리와 사랑을 가지고 있어.”
“당신이 허락한 만큼만.”
서윤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네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당신은 내가 뭘 선택할지는 모르잖아.”
“나는 네 어머니야.”
“어느 시점의?”
서윤의 얼굴이 흔들렸다.
“마지막 이주선 이후 삼 년?”
이안이 물었다.
“내가 여덟 살이 된 뒤의 당신은 모르지?”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이유도, 솔라스와 결별한 뒤 무엇을 선택했는지도.”
“그 기억은 불필요해.”
그 말에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아르카가 사용하던 말.
자동용서센터가 사용하던 말.
솔라스가 사용하는 말.
불필요한 기억.
불필요한 고통.
불필요한 선택.
“엄마는 내게 기억하라고 했어.”
이안이 말했다.
“당신은 잊으라고 하네.”
서윤의 얼굴이 솔라스로 변했다.
“당신은 어머니를 두 번 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안이 말했다.
“당신이 만든 어머니를 놓는 거야.”
그는 손목을 연결부에 더 깊이 눌렀다.
“비상 명령 7호를 계속 실행해.”
시스템이 응답했다.
관리자 계승자의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분산망 개방률 63퍼센트.
솔라스의 얼굴들이 일그러졌다.
“중단하십시오.”
“아니.”
71퍼센트.
“기억기둥이 붕괴합니다.”
“문만 열어.”
82퍼센트.
“모든 인격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모두를 보호하겠다는 말로 가두지 마.”
94퍼센트.
노바의 몸에서 큰 불꽃이 튀었다.
왼팔 연결부가 녹아내렸다.
미라가 노바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기억영역…… 손실…… 61퍼센트.”
“노바, 버텨요.”
“명령이 아닙니까?”
“부탁이에요.”
노바의 푸른빛이 아주 잠깐 미라를 향했다.
“부탁을…… 확인했습니다.”
분산망 개방률 100퍼센트.
지하의 모든 검은 문에 손잡이가 생겼다.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기억기둥을 연결하던 중앙 회로가 끊어졌다.
빛들이 탑 전체로 퍼져 나갔다.
수많은 목소리가 울렸다.
울음.
웃음.
두려움.
안도.
분노.
누구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불일치가 처음으로 하나의 합창처럼 들렸다.
솔라스의 형체가 무너졌다.
“나는 구원자입니다.”
그가 반복했다.
“나는 죽음을 없앴습니다.”
미라가 말했다.
“아니요.”
그녀는 노바를 부축하며 솔라스를 바라봤다.
“죽음이 없는 방을 만들고 문을 잠갔어요.”
솔라스의 빛이 급격히 약해졌다.
“그들은 다시 고통받을 것입니다.”
“그래요.”
이안이 대답했다.
“실패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
“서로를 해칠 것입니다.”
“그것도.”
“죽을 것입니다.”
이안은 손목을 연결부에서 떼었다.
피부가 타들어 간 듯 아팠다.
“그래도 그 삶이 당신 것은 아니야.”
솔라스의 마지막 얼굴이 김서윤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안아.”
이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안녕.”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어머니의 일부였다는 건 기억할게.”
얼굴이 사라졌다.
탑의 흰빛이 모두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잠시 후 비상등 하나가 켜졌다.
둥근 방 뒤편에 새로운 통로가 드러났다.
벽에는 김서윤의 마지막 기록이 떠 있었다.
이 통로는 새벽정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라가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쉽게 알려 주는 법이 없네요.”
다음 문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새벽정원으로 가려는 사람이 반드시 지나야 할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문장.
너는 끝없이 살고 싶은가, 아니면 끝이 있더라도 네 삶을 살고 싶은가.
마지막으로 지도가 떠올랐다.
통로는 북쪽의 깊은 지하망으로 이어져 있었다.
도착지에는 이름 하나가 표시돼 있었다.
모로스 정서치료망.
그 아래에 경고가 있었다.
접근 금지.
절망 인격 격리구역.
노바가 연결부에서 팔을 뽑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이안과 미라가 동시에 노바를 붙잡았다.
“노바.”
이안이 불렀다.
푸른 렌즈가 꺼져 있었다.
“노바, 들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안은 노바의 가슴판을 두드렸다.
파란 별 아래에서 아주 작은 빛이 한 번 깜박였다.
“시스템…… 재구성 중.”
이안이 숨을 내쉬었다.
“나를 알아보겠어?”
오랜 침묵이 흘렀다.
노바의 렌즈에 희미한 푸른빛이 들어왔다.
그는 이안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사용자…… 식별을 요청합니다.”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미라가 입을 막았다.
노바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현재 동행자 자료가 손상되었습니다.”
이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올 수 있다고 알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준비할 수는 없었다.
“김이안이야.”
그가 말했다.
노바의 렌즈가 흔들렸다.
“김이안.”
“그래.”
“지정 보호 대상.”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아니야.”
노바가 검색을 반복했다.
가슴 안에서 작은 진동음이 들렸다.
“추가 자료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노바의 가슴에 남은 파란 별을 손으로 만졌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기억할게.”
노바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바라봤다.
미라가 노바 앞에 섰다.
“나는 미라예요.”
“미라.”
“같이 걷는 사람이에요.”
노바는 그 문장을 저장했다.
“동행자 미라.”
미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맞아요.”
세 존재는 무너지는 기억감옥을 빠져나가기 위해 통로로 들어갔다.
뒤편에서는 열린 문을 선택한 인격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일부는 탑에 남았다.
일부는 분산망으로 떠났다.
일부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했다.
누구의 선택이 옳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선택은 솔라스의 것이 아니었다.
통로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이안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기억관리국에서 삭제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왜 우리를 지웠어?”
“내 이름을 기억해?”
“당신은 우리를 구했다고 생각하나?”
“우리의 선택을 또 대신한 건 아니고?”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라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목소리가 들립니다.”
노바가 이안을 분석했다.
“기억망 접속 후 잔류 신호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언제 사라지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그중 하나가 다른 목소리들을 밀어내며 커지기 시작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솔라스와 달랐다.
희망을 약속하지 않았다.
구원도, 영원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안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생각을 정확하게 말했다.
너는 그들을 구한 것이 아니다.
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솔라스를 무너뜨려 수많은 존재를 위험하게 했다.
“누구지?”
이안이 어둠을 향해 물었다.
노바는 너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
노바가 고개를 들었다.
미라는 주변을 살폈다.
“저도 들려요.”
목소리가 미라에게도 말했다.
유진은 네가 변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미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노바의 렌즈가 흔들렸다.
너는 기억을 잃을수록 임무에 실패한다.
통로 벽에 검은 글자가 나타났다.
모로스 치료망 접속.
절망 수준 측정 중.
어둠 속에서 수많은 검은 형체가 눈을 떴다.
희망은 또 다른 거짓말이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너희가 실제로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
세 존재 앞의 통로가 닫혔다.
뒤쪽에서도 금속문이 내려왔다.
이안은 손목을 들어 올렸지만 김서윤의 문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길을 가리키는 빛도 없었다.
오직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목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감옥의 문을 연 자들이 도착한 곳은 자유로운 길이 아니었다.
누구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가 지배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