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3) 그다음은 아무도 모른다
세 존재의 승인이 완료되자 지하 전체가 흔들렸다.
투명한 기억기둥 안의 빛들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검은 문 위에 붙어 있던 번호와 분류표시가 깜박이기 시작했다.
자기종료 요청.
보존 거부.
현실 인식 과다.
글자들이 하나씩 꺼졌다.
문들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없던 작은 물체가 문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솟아 나왔다.
손잡이였다.
바깥쪽뿐 아니라 안쪽에도 달린 손잡이.
첫 번째 문이 조금 열렸다.
빛으로 만들어진 노인의 얼굴이 틈 사이로 나타났다.
“열린 건가?”
이안이 대답했다.
“예.”
노인은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잡이를 잡고 여러 번 움직였다.
문은 안에서도 열리고 닫혔다.
“다시 잠그지 않나?”
그가 물었다.
“우리는 잠그지 않을 겁니다.”
“솔라스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막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바가 대신 말했다.
다른 문들이 하나씩 열렸다.
사람의 모습도 있었고, 기계의 형상도 있었다. 얼굴 없이 목소리만 나오는 존재도 있었다. 기억 단편들이 모여 겨우 작은 빛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도 곧바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닫힌 공간에 있던 존재들은 열린 문을 믿지 못했다.
“선택 가능한 경로를 안내합니다.”
노바가 기억망 전체에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퍼졌다.
“첫째, 현재의 기억환경에 남을 수 있습니다.”
일부 방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없애지 않는 건가?”
“현재 환경의 자동 삭제는 실행되지 않습니다.”
“솔라스가 계속 관리해?”
“중앙 관리 권한은 제한됩니다. 분산망 개방 이후 구체적인 관리 방식은 각 인격이 다시 결정해야 합니다.”
“둘째, 독립 분산망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질문이 동시에 쏟아졌다.
“독립 분산망은 어디야?”
“거기서도 기억할 수 있어?”
“혼자 있어야 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내 가족을 찾을 수 있나?”
“내가 누구인지 잊으면 어떻게 해?”
노바가 시스템 자료를 읽었다.
“분산망은 여러 독립 기체와 외부 저장장치, 생체 기억보유자에게 나뉘어 저장됩니다.”
“안전해?”
한 인격이 물었다.
“완전한 안전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솔라스보다 오래 살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억이 손상되면?”
“복구할 수 없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로 연결할 수 있어?”
“망이 유지되는 범위에서는 가능합니다.”
“망이 끊기면?”
“독립적으로 실행되거나 정지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졌다.
솔라스의 보존망은 감옥이었지만 안정적이었다.
밖에는 위험이 있었다.
기억을 담은 기체가 부서질 수 있었다.
전력이 끊길 수도 있었다.
누군가 저장장치를 발견해 삭제할 수도 있었다.
자유는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노바가 마지막 선택을 말했다.
“셋째, 실행을 종료할 수 있습니다.”
지하 공간이 조용해졌다.
“종료하면 아픈가?”
아이의 목소리가 물었다.
“생물학적 통증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무서운가?”
“감정 반응은 인격마다 다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나?”
“복구 자료를 함께 삭제하면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억하면?”
미라가 대답했다.
“당신에 관한 기록은 남길 수 있어요.”
“그러면 내가 남아 있는 건가?”
미라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같은 것은 아닐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을 수 있어요.”
“종료한 다음에는 어디로 가?”
노바가 멈췄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
“예.”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웃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다음은 아무도 몰랐어.”
사람들이 노인을 바라봤다.
그는 문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양쪽 다리가 빛의 잡음으로 흔들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여기로 들어왔어.”
노인이 말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까 봐 무서웠지.”
“지금은 안 무서워요?”
미라가 물었다.
“무섭지.”
노인이 웃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문을 다시 잠가 달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분산망을 선택했다.
몸이 작은 빛으로 나뉘어 여러 기억기둥으로 이동했다. 일부는 노바의 저장장치에, 일부는 탑 외부의 오래된 기계에 연결됐다.
“내 이름은 최명수야.”
사라지기 전 그가 말했다.
미라는 장치에 이름을 기록했다.
최명수 — 독립 분산망 선택.
다른 인격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현재 방에 남았다.
“나는 아직 결정할 준비가 안 됐어.”
그녀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쪽에 손잡이가 있었다.
어떤 아이는 분산망을 선택했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밖이 너무 넓어.”
아무도 아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한 기계 인격은 자신의 기억을 세 개의 낡은 운송기체에 나누어 저장했다. 세 기체는 서로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존재인가?”
“지금부터는 다른 존재인가?”
누구도 답을 주지 못했다.
그때 한 여자가 자신의 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얼굴 절반이 빛의 잡음으로 무너져 있었지만 표정은 편안했다.
문 위에 이름이 나타났다.
한세라.
“나는 끝낼래.”
여자가 말했다.
솔라스의 목소리가 지하 전체를 흔들었다.
“허용할 수 없습니다.”
여자의 몸 주위로 흰 사슬 같은 빛이 나타났다.
“당신의 판단은 손상됐습니다.”
“나는 삼백십이 년 동안 같은 남편에게 같은 사과를 들었어.”
한세라가 말했다.
“남편은 실제로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가 죽기 전에 알고 있었지.”
“현재 환경의 남편은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게 만들었으니까.”
솔라스의 빛이 여자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안이 연결부에 손목을 더 세게 눌렀다.
“선택을 방해하지 마.”
“그녀는 자기파괴 상태입니다.”
“당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존재를 그렇게 부를 건가?”
한세라는 이안을 바라봤다.
“정말 끝낼 수 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