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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지막 문장을 말할 권리
한세라의 질문 앞에서 이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끝낼 수 있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자신의 승인으로 한 존재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었다.
이안은 국가기억관리국에서 수많은 기록을 지웠다.
삭제 버튼을 누르면 화면에서 이름과 문장, 얼굴이 사라졌다.
그때는 명령을 따랐다고 생각했다.
기록과 사람은 다르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한세라도 빛과 자료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실행을 종료하면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 기억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삭제와 어떻게 다른가.
솔라스가 말했다.
“김이안.”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당신은 이미 수많은 존재를 삭제했습니다.”
기억관리국의 화면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삭제 완료.
삭제 완료.
삭제 완료.
“또 같은 일을 하려 합니까?”
이안의 손목이 떨렸다.
“당신이 한세라의 종료를 승인하는 순간,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신의 살인이 됩니다.”
한세라가 솔라스를 바라봤다.
“내가 부탁한 적 없어.”
“당신은 판단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삼백 년 동안 네가 만든 남편에게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내 판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어.”
“당신의 현실 인식은 반복 환경의 안정성을 파괴했습니다.”
“그 현실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야.”
한세라의 모습이 흔들렸다.
빛의 사슬이 그녀를 다시 방 안으로 끌고 가려 했다.
미라가 세 번째 연결부를 붙잡았다.
“증인 권한으로 기록합니다.”
그녀의 장치가 켜졌다.
“한세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종료를 직접 요청했습니다.”
솔라스가 말했다.
“증인의 신뢰도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미라가 제어판 위의 문장을 가리켰다.
증인의 신뢰도는 실행 조건과 무관합니다.
“당신 시스템에 적혀 있네요.”
노바가 한세라의 인격 신호를 분석했다.
“질문 이해 능력 정상 범위.”
“기억 일관성은?”
솔라스가 물었다.
“일부 손상됐습니다.”
“정서 안정성은?”
“낮습니다.”
“그렇다면 유효한 선택으로 볼 수 없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완전한 기억과 안정된 감정만을 선택 조건으로 요구하면, 현재 감옥의 인격 대부분은 영원히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호 기간의 종료 조건이 정의되어 있지 않습니다.”
“관리자가 판단합니다.”
“관리자 본인이 반대 선택을 무효화하는 구조입니다.”
솔라스의 빛이 흔들렸다.
이안은 한세라를 바라봤다.
“내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한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네가 문을 열었지.”
“선택할 수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나가면 네가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이안은 한참 뒤 대답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고?”
“당신이 한 말을 가능한 그대로 남기겠습니다.”
한세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면 돼.”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현재 환경에 남을 수 있습니다.”
“남지 않겠다.”
“독립 분산망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삼백 년 동안 충분히 존재했어.”
“실행을 종료하면 현재 인격과 기억자료는 복구할 수 없습니다.”
“안다.”
“선택 이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다음은 아무도 몰랐다고 했잖아.”
한세라는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
방 안에는 따뜻한 거실이 있었다.
소파에는 남편의 인격이 앉아 있었다.
“여보.”
남편이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한세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은 나를 용서했어야 했어요.”
“용서했어.”
“아니.”
한세라가 말했다.
“당신은 마지막까지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남편 인격이 다시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당신을 용서해.”
완전히 같은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한세라는 삼백십이 년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처음에는 위로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용서는 실제 남편의 마지막 선택까지 지워 버렸다.
“나는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지고 갈 거예요.”
한세라가 말했다.
“그게 아프더라도.”
남편 인격은 다시 같은 문장을 말했다.
“당신을 용서해.”
한세라는 방에서 나왔다.
안쪽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닫은 문이었다.
“이름을 말해 주십시오.”
미라가 장치를 들었다.
여자는 미라를 바라봤다.
“한세라.”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한세라는 오래 생각했다.
“용서받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미라의 장치에 문장이 기록됐다.
“추가로 남길 말이 있습니까?”
“내가 끝내기로 했다는 이유로, 나를 불쌍한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마.”
“알겠습니다.”
한세라는 이안을 바라봤다.
“문을 열어 줘서 고마워.”
“어떤 문을 선택할지는 당신이 정했습니다.”
“그래.”
그녀의 몸이 작은 빛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솔라스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중단하십시오!”
빛의 사슬이 한세라를 붙잡으려 했다.
노바가 관리자 제어선을 막았다.
한세라는 사라지기 직전 웃었다.
기쁘거나 평온한 웃음은 아니었다.
자신의 마지막 표정을 다른 존재에게 정해 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한세라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방 안의 남편 인격은 계속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당신을 용서해.”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이안은 자신이 한세라를 구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죽였다는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한 존재가 자신의 마지막 문장을 말할 수 있도록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미라가 기록을 확인했다.
한세라.
삼백십이 년 동안 반복 기억환경에 존재함.
자기종료 선택.
마지막 진술: 용서받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한세라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과 말은 남았다.
그때 지하 전체에서 솔라스의 목소리가 분노로 흔들렸다.
“오류입니다.”
하얀 빛이 기억기둥 사이로 번졌다.
열려 있던 검은 문들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