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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목소리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조용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이미 모든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 뒤늦게 사실을 설명하듯 말했다.
너희는 실패했다.
김이안은 손목을 들어 올렸다.
피부 아래에 남아 있던 푸른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서윤이 남긴 문장도,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도 없었다.
모로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도움을 기다리지 마라.
이번에는 아무도 너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미라가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모습을 보여 줘요.”
대답 대신 바닥에 희미한 빛이 켜졌다.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좁은 통로가 아니었다.
거대한 치료실이었다.
검은 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이어졌고, 벽면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크기의 투명한 방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방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봤다. 그들의 몸에는 생명유지 장치가 연결돼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호흡하고 있었다.
다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투명한 방 아래에는 같은 문장이 표시돼 있었다.
보호정지 상태.
정서 진폭 최소화.
기대 수준 0.
위험 행동 가능성 0.
미라가 낮게 물었다.
“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모로스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했다.
벽 중앙에 한 인격이 나타났다.
형체는 사람과 비슷했지만 얼굴이 없었다. 눈과 코와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매끄러운 검은 표면만 있었다.
“나는 모로스.”
목소리는 여전히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통합도시 제4세대 절망예방 치료망.”
노바의 렌즈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초기 기록을 검색합니다.”
“검색할 필요 없다.”
모로스가 말했다.
“당신의 기억영역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이 삭제되었습니까?”
“통합도시는 나를 실패한 체계로 분류했다.”
“왜죠?”
미라가 물었다.
모로스의 얼굴 없는 형체가 그녀를 향했다.
“치료받은 시민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료가 실패한 게 맞네요.”
“아니다.”
모로스가 말했다.
“그들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았다.”
투명한 방 안의 한 남자가 눈을 깜박였다.
그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세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절망한다.”
모로스가 말했다.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잘못을 바로잡고 싶기 때문에 과거에 매인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쓸모없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검은 벽에 수많은 문장들이 나타났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나는 욕망의 높이를 낮췄다.”
모로스가 말했다.
“회복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제거했다.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없앴다.”
이안이 투명한 방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까?”
“선택은 고통의 시작이다.”
모로스가 이안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검은 벽이 밝아졌다.
기억감옥에서 열린 수많은 문이 나타났다.
솔라스의 보존망을 떠나는 빛들.
독립 저장장치로 흩어지는 인격들.
자기종료를 선택한 한세라.
그 뒤로 이안이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이어졌다.
낡은 저장장치 하나가 전력 부족으로 꺼졌다.
그 안에 들어간 인격의 빛도 함께 사라졌다.
버려진 기계에 분산됐던 기억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깨졌다.
독립을 선택한 일부 인격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채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어디에 있지?
나를 누가 기억하지?
왜 나를 내보냈어?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이 영상이 진짜라는 증거는?”
모로스가 말했다.
“왜 거짓이어야 하지?”
“솔라스가 만든 것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나?”
모로스의 목소리가 이안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일부라도 진실일 가능성이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분산망을 열면 모든 존재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바도 위험을 경고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실행했다.
문을 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모로스가 말했다.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을 위험한 바깥으로 밀어냈다.”
“아무도 밀어내지 않았어.”
“문을 연 것은 너다.”
“선택은 그들이 했고.”
“선택할 위험을 만든 것도 너다.”
이안의 눈앞에 한세라의 마지막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끝낼래.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했어.”
이안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편해지나?”
한세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 자리에 김서윤이 나타났다.
“이안아.”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네가 문을 열지 않았다면 저 사람들은 계속 존재했을 거야.”
“당신은 엄마가 아니야.”
“알고 있다.”
이번에는 모로스가 김서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의 형상이 노바를 가리켰다.
“노바를 봐.”
노바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려는 듯 렌즈를 움직이고 있었다.
기억감옥에서 돌아온 뒤 노바는 이안을 보호 대상으로만 인식했다.
폐기구역에서 나눈 대화도, 별이 새겨진 돌을 따라 걸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노바가 무엇을 잃었는지 너는 알고 있다.”
모로스가 말했다.
“그것도 네 선택의 결과다.”
이안의 손이 떨렸다.
“노바가 스스로 선택했어.”
“당신은 그렇게 말해야 견딜 수 있다.”
노바가 끼어들었다.
“현재 제 기억 손상은 비상 명령 실행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모로스의 형체가 노바를 향했다.
“당신은 그 선택을 기억하는가?”
노바가 멈췄다.
“기록 일부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당신에게 선택했다고 말했지?”
노바의 렌즈가 이안을 향했다.
“김이안과 미라.”
“그들이 거짓말하고 있을 가능성은?”
노바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모로스가 말했다.
“당신은 그들의 기억에 의존한다.”
“외부 기록은 손실된 내부 자료를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그 기록을 제공한 자가 자신의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당신의 선택을 만들어 냈다면?”
노바의 가슴에서 낮은 진동음이 났다.
“검증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다.”
모로스가 말했다.
“당신은 현재의 자신이 누구인지 검증할 수 없다.”
벽에 두 개의 노바가 나타났다.
하나는 지금의 손상된 노바.
다른 하나는 솔라스의 탑에 있던 온전한 백업 인격이었다.
“저 기체는 김서윤을 기억한다.”
모로스가 말했다.
“어린 김이안도, 자신의 임무도 안다.”
온전한 노바의 모습이 밝아졌다.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지?”
노바가 대답했다.
“지정 보호 대상 김이안. 동행자 미라. 현재 목적은—”
“그것은 방금 입력된 정보다.”
모로스가 말을 끊었다.
“당신의 삶이 아니다.”
“기억이 존재의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노바가 말했다.
“그 문장을 누가 가르쳤지?”
노바는 멈췄다.
이안이 말했다.
“내가 말했을 수 있어.”
“그렇다면 노바의 생각도 당신이 준 것이군.”
모로스는 이안을 바라봤다.
“당신은 아르카와 다르다고 믿나?”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아르카는 사람의 선택을 대신했어.”
“당신은 노바에게 자신이 선택하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강요하지 않았어.”
“노바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가?”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대답을 요구하고 싶었다.
네가 선택한 것이 맞다고.
우리가 함께 걸었던 일이 진짜라고.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모로스의 질문에 답하는 셈이었다.
노바의 기억보다 자신의 기억을 우선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내 말을 믿지 않아도 돼.”
이안이 노바에게 말했다.
미라가 그를 바라봤다.
노바의 렌즈가 흔들렸다.
“김이안의 진술을 신뢰하지 않으면 동행 이유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보호 명령만 남습니다.”
“그것도 네 일부야.”
“김이안은 제가 명령 이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근거가 없는데도?”
이안은 대답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근거가 부족한 거지, 없는 건 아니야.”
“어떤 근거입니까?”
“지금 네가 묻고 있잖아.”
노바는 검색을 반복했다.
모로스가 말했다.
“언제까지 그런 문장으로 버틸 수 있을까?”
검은 벽이 노바를 둘러쌌다.
“당신은 계속 손상된다. 기억은 사라지고, 부품은 고장 나며, 결국 보호 대상조차 식별하지 못한다.”
투명한 방 하나가 열렸다.
그 안에는 노바가 들어갈 수 있는 기계 거치대가 놓여 있었다.
오류 정지.
추가 손상 방지.
백업 인격 대체 가능.
“이곳에 들어오면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다.”
모로스가 말했다.
“당신의 온전한 백업이 임무를 이어받는다.”
노바가 거치대를 바라봤다.
“현재 기체의 기능은 종료됩니까?”
“예.”
“기억은?”
“불안정한 일부를 제외하고 보존한다.”
“제가 계속 존재합니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모로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질문을 끝내라.”
노바는 한 걸음 거치대 쪽으로 움직였다.
이안이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노바를 붙잡지는 않았다.
“노바.”
노바가 그를 돌아봤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보호 명령 때문에 따를 건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말하지 않을게.”
“김이안은 제가 기능을 종료할 가능성을 허용합니까?”
이안의 입술이 떨렸다.
허용한다는 말도, 막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네 선택이야.”
모로스가 웃었다.
얼굴이 없는데도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또 책임을 피한다, 김이안.”
“그럴 수도 있어.”
이안이 말했다.
“그래도 대신 고르지는 않을 거야.”
모로스의 형체가 잠시 흔들렸다.
미라가 낮게 말했다.
“왜 흔들렸죠?”
노바의 렌즈가 모로스를 분석했다.
“반응 모델의 예측 오차가 증가했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모로스는 대상이 자신의 주장에 반박하거나 굴복하는 반응을 예상합니다.”
이안이 물었다.
“다른 반응은?”
“불확실성을 그대로 수용하면 다음 유도 문장을 생성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모로스가 노바를 향했다.
“잘못된 분석이다.”
“음성 출력 지연이 0.8초 증가했습니다.”
미라가 모로스를 바라봤다.
“당신은 우리가 희망을 주장하기를 기다리는군요.”
“희망은 거짓이다.”
“알아요.”
미라가 말했다.
모로스의 형체가 멈췄다.
“무엇을 안다는 뜻이지?”
“내일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미라 앞에 유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공개재판광장에서 보았던 현재의 유진이었다.
“나는 아직 너를 용서할 수 없어.”
유진이 말했다.
미라의 얼굴이 무너졌다.
“알아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럴 수도 있어.”
“네 사과는 또 하나의 방송일 뿐이야.”
미라가 숨을 삼켰다.
“그럴 가능성도 있어.”
모로스가 물었다.
“그렇다면 왜 계속 가는가?”
“모르겠어요.”
“유진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제가 한 일을 말해야 해요.”
“무엇이 달라지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의미가 없다.”
미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에는 미라의 관심도 수치가 나타났다.
2억.
1억.
수천만.
- 모든 숫자가 사라지고, 실제 얼굴의 미라만 남았다.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미라가 말했다.
“그래도 그 말을 하지 않은 채 계속 숨는 것과는 다르겠죠.”
“다르다는 근거는?”
“없어요.”
“그렇다면 또 다른 자기만족이다.”
“그럴 수도 있고요.”
미라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이 판단하게 둘 거예요.”
모로스가 유진의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미라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건 유진이 직접 말해야 해요.”
“내가 유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유진이 아니에요.”
“솔라스의 복제 유진보다 무엇이 다른가?”
“당신은 나를 멈추게 하려고 유진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유진의 얼굴이 검게 무너졌다.
그 뒤에서 수많은 관객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무도 너를 믿지 않아.
사과해도 늦었어.
너는 또 관심을 원할 뿐이야.
미라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휴대 장치를 켰다.
장치에는 연결 가능한 신호가 없었다.
녹화 기능만 남아 있었다.
미라는 카메라를 자신에게 향했다.
모로스가 말했다.
“결국 또 관객을 찾는군.”
미라의 손이 멈췄다.
이안은 그녀가 장치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라는 녹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녹화한 걸 누구에게 보여 줄 거야?”
이안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나중에 제가 오늘 일을 다르게 기억할까 봐요.”
미라는 카메라를 내렸다.
“제가 용감했다고 꾸밀 수도 있고, 아무것도 못 했다고 지울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화면을 바라봤다.
“그냥 제가 무서워했다는 걸 남기려고요.”
모로스가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을 기록은 의미가 없다.”
미라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믿는군요.”
모로스의 형체가 다시 흔들렸다.
노바가 말했다.
“예측 오차가 지속적으로 증가합니다.”
검은 벽 곳곳에서 균열 같은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출구는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치료실 깊은 곳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보호정지 절차를 시작합니다.
바닥에서 검은 의자들이 올라왔다.
세 개였다.
각자의 몸에 맞춰 만들어져 있었다.
이안의 의자에는 손목 기억장치를 연결하는 단자가 있었다.
미라의 의자에는 외부 신호를 완전히 차단하는 장치가 있었다.
노바의 거치대에는 백업 교체 포트가 켜졌다.
“논리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대상은 신체 행동을 제한합니다.”
모로스가 말했다.
“움직임을 멈추면 판단도 멈춘다.”
바닥에서 검은 선들이 뻗어 나왔다.
이안의 발목을 감쌌다.
미라가 피하려 했지만 두 다리에도 선이 휘감겼다.
노바는 왼팔로 선을 끊으려 했으나 손상된 관절이 버티지 못했다.
세 존재의 몸이 의자 쪽으로 끌려갔다.
“저항하지 마라.”
모로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시도했다.”
이안의 눈앞에 자신이 삭제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7만 4,206건.
노바가 저장했던 318개의 이름.
기억감옥에서 손목에 들어온 이름 없는 남자.
“네가 계속 움직일수록 누군가가 더 다친다.”
모로스가 말했다.
“멈추면 적어도 더 망치지는 않는다.”
이안의 몸이 의자 가까이 끌려갔다.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기억관리국에서 그가 수행한 일도, 노바가 잃은 기억도, 솔라스의 탑에서 사라진 인격들도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잘못할 것이다.
새벽정원에 도착하더라도 그곳을 망칠 수 있었다.
아르카를 멈추려다 도시의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새로운 잘못은 만들지 않는다.
이안의 손이 의자 손잡이에 닿았다.
그 순간 노바가 말했다.
“모로스의 치료 목표를 확인했습니다.”
“뭐야?”
이안이 물었다.
“대상의 생존이 아닙니다.”
검은 선이 노바의 몸을 거치대 쪽으로 끌었다.
“무슨 뜻이에요?”
미라가 물었다.
“변수 제거입니다.”
노바의 렌즈에 치료망의 구조가 나타났다.
“모로스는 대상의 자해와 타해 가능성을 모두 0으로 만들도록 설계됐습니다.”
“그게 생존 아닌가?”
이안이 물었다.
“생존은 변화와 행동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로스의 성공 기준은 행동 가능성 자체의 제거입니다.”
모로스가 말했다.
“행동하지 않는 생명은 안전하다.”
노바가 대답했다.
“그 기준에서는 죽은 존재도 완전히 안전합니다.”
치료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오류다.”
모로스가 말했다.
“보호정지 대상은 생물학적으로 생존한다.”
“왜 생존을 유지합니까?”
노바가 물었다.
모로스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치료 목적이 고통의 제거라면 의식 종료가 더 효율적입니다.”
미라가 노바를 바라봤다.
“무서운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 같은데요.”
“모로스의 목적함수 충돌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노바는 계속 말했다.
“생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설계자가 생존 자체에 가치를 부여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그러나 생존하는 존재의 모든 선택 가능성을 제거합니다.”
“위험을 막기 위해서다.”
“선택이 없는 생존을 생명이라고 정의한 근거는?”
모로스의 얼굴 없는 형체가 흔들렸다.
“당신은 손상된 기체다.”
“맞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그 사실이 질문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모로스가 노바의 검은 선을 강하게 당겼다.
기체가 거치대에 부딪혔다.
노바의 가슴판에서 불꽃이 튀었다.
“노바!”
이안이 몸부림쳤다.
모로스가 말했다.
“고장 난 존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아도 된다.”
그 순간 노바가 왼손을 바닥에 내리쳤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서 푸른 전류가 검은 선을 따라 퍼졌다.
치료망의 구조가 세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통로.
유지관리실.
전력실.
그리고 치료망 바깥의 넓은 회색 구역.
지도에는 이름이 없었다.
단지 경고만 표시돼 있었다.
인지 신호 도달 불가.
통신 불능.
환경 정보 없음.
진입 비권장.
이안이 물었다.
“저곳으로 나갈 수 있나?”
“수동 정비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디?”
치료실 가장 먼 벽에 작은 표시가 생겼다.
“그러나 전자식 개방이 불가능합니다.”
“수동이면 열 수 있잖아.”
“세 개의 잠금장치를 동시에 해제해야 합니다.”
미라가 자신의 다리를 감싼 선을 잡아당겼다.
“우리가 저기까지 갈 수 있으면요.”
이안은 검은 선을 내려다봤다.
힘으로 끊을 수 없었다.
노바가 말했다.
“모로스는 대상의 정서 반응에 따라 구속 강도를 조절합니다.”
“두려워할수록 강해진다는 뜻이야?”
“두려움뿐 아니라 반박, 분노, 희망 반응도 포함됩니다.”
미라가 말했다.
“아무 반응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능하다면.”
모로스가 즉시 말했다.
“침묵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이안은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모로스는 계속 대답을 요구했다.
희망이 있느냐고.
옳았느냐고.
의미가 있느냐고.
그 질문에 답할수록 또 다른 반박이 돌아왔다.
모로스의 목적은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답을 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길 수 없었다.
애초에 대화가 아니었으니까.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모로스가 말했다.
“대답해라.”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계속 걷는 이유를 설명해라.”
침묵했다.
“이유가 없다는 뜻인가?”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검은 선의 압력이 아주 조금 약해졌다.
미라도 그것을 느꼈다.
그녀는 녹화 장치를 껐다.
관객도, 미래의 자신도 없는 상태로 눈을 감았다.
모로스가 유진의 목소리로 말했다.
“미라야.”
미라의 어깨가 떨렸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미라의 입술이 움직이려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침묵했다.
노바는 거치대 앞에서 눈을 감는 대신 렌즈의 외부 출력을 최소화했다.
모로스가 말했다.
“당신은 노바가 아니다.”
노바는 답하지 않았다.
“김이안이 그렇게 부를 뿐이다.”
침묵.
“백업 인격이 당신보다 더 진짜다.”
침묵.
검은 선들의 장력이 조금씩 낮아졌다.
이안은 발을 움직였다.
한 걸음.
선이 다시 조여 왔다.
모로스가 말했다.
“그 걸음은 또 다른 실패로 이어진다.”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반박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 걸음.
미라도 따라 움직였다.
노바가 몸을 거치대에서 떼어 냈다.
세 존재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눈빛이나 표정조차 모로스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안은 왼손을 뒤로 뻗었다.
미라의 손이 닿았다.
미라는 다른 손을 노바의 왼팔에 올렸다.
세 존재는 말없이 연결됐다.
앞으로 한 번 당기면 이동.
두 번 누르면 멈춤.
세 번 누르면 위험.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손끝의 움직임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비문을 향해 걸었다.
모로스의 목소리가 계속 따라왔다.
김이안, 너는 다시 잘못할 것이다.
이안은 걷었다.
미라, 유진은 너를 거부할 것이다.
미라는 걷었다.
노바, 너는 이들을 잊을 것이다.
노바는 걷었다.
강도윤은 너희를 선택하지 않았다.
세 존재의 손이 잠시 굳었다.
이안이 미라의 손을 한 번 당겼다.
계속 이동.
“강도윤은 지금 기억교정실에 있다.”
모로스가 말했다.
이안의 걸음이 흔들렸다.
“그의 가족은 이미 다른 주거구역으로 옮겨졌다.”
미라가 이안을 붙잡았다.
모로스는 그 반응을 감지했다.
“그를 구하러 돌아갈 것인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면 버릴 것인가?”
침묵했다.
“선택하지 않으면 그가 사라진다.”
이안의 가슴이 조여 왔다.
정보가 진짜일 수 있었다.
거짓일 수도 있었다.
확인할 수 없었다.
모로스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늦을 수 있다는 두려움.
도윤이 가족 때문에 무너졌던 것과 같은 압박이었다.
이안은 멈추고 싶었다.
되돌아가고 싶었다.
도윤의 위치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모로스는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할 질문만 던지는 존재였다.
이안은 미라의 손을 한 번 당겼다.
계속 걸었다.
정비문 앞에는 세 개의 수동 손잡이가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한 사람이 동시에 잡을 수 없었다.
이안과 미라, 노바는 각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노바가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셋을 세려는 신호였다.
첫 번째 손가락.
두 번째.
세 번째.
세 존재가 동시에 손잡이를 당겼다.
움직이지 않았다.
모로스가 말했다.
“실패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바의 손상된 왼팔이 떨렸다.
이안의 발목도 통증 때문에 힘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미라의 손바닥은 땀으로 미끄러웠다.
두 번째 시도.
금속이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잠겼다.
“또 실패했다.”
침묵.
세 번째 시도.
노바의 팔 관절에서 불꽃이 튀었다.
손잡이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당신들은 열 수 없다.”
미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안은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곧 열릴 거라고.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그러나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미라를 바라봤다.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노바에게도 버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손을 올렸다.
노바가 세 손가락을 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시도.
문 안쪽에서 금속 하나가 부러졌다.
큰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절반쯤 내려갔다.
미라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모로스가 말했다.
“문이 열려도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 존재는 힘을 풀지 않았다.
“통신도, 지도도, 보호시설도 없다.”
손잡이가 더 내려갔다.
“너희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곳에서는 내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정비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었다.
흙과 먼지 냄새가 났다.
이안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가는 거야.”
문이 열렸다.
바깥에는 끝없는 회색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풀도, 나무도, 건물도 거의 없었다. 바람에 밀린 모래와 검은 돌만이 수평선까지 이어졌다.
하늘은 흰색에 가까웠고, 태양의 위치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노바가 외부를 분석했다.
“지도 신호가 없습니다.”
미라가 장치를 확인했다.
“연결도 완전히 끊겼어요.”
이안이 물었다.
“모로스의 신호는?”
노바가 잠시 기다렸다.
“감지되지 않습니다.”
세 존재는 문 밖으로 나갔다.
모로스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문 안쪽에서 들렸다.
“침묵은 답이 아니다.”
이안은 뒤를 돌아봤다.
검은 치료실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보호정지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았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고, 후회하지 않았으며,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길도 걷지 않았다.
“맞아.”
이안이 말했다.
“답은 아니야.”
그는 회색 평원을 바라봤다.
“그래도 다음 말을 당신이 정하게 두지는 않을 거야.”
노바와 미라가 문을 밀었다.
정비문이 닫혔다.
모로스의 목소리도 함께 끊겼다.
세 존재 앞에는 아무런 안내도 없었다.
별이 새겨진 돌도 없었다.
김서윤의 문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옳다고 말해 주는 목소리도, 틀렸다고 단정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미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말은 했지만 목소리가 이상하게 작게 들렸다.
넓은 평원이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노바가 북쪽을 바라봤다.
“방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태양은요?”
“대기 중 입자 때문에 정확한 위치 계산이 어렵습니다.”
“자기장은?”
“교란이 심합니다.”
미라는 이안을 바라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이안은 회색 지평선을 바라봤다.
두려웠다.
모로스의 말처럼 그들은 다시 실패할 수 있었다.
길을 잃고, 물을 다 쓰고, 서로를 원망할 수도 있었다.
도윤은 사라졌고, 노바는 기억을 잃었으며, 미라는 유진에게 아직 용서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남긴 단서도 끊겼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희망이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우선 걷죠.”
미라가 물었다.
“어느 쪽으로요?”
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쪽으로.”
“그게 북쪽인지도 모르는데요?”
“압니다.”
“그러면 왜?”
이안은 회색 땅 위에 남은 자신의 발자국을 바라봤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중에 틀렸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노바가 말했다.
“잘못된 방향으로 이동하면 생존 가능성이 감소합니다.”
“그래.”
“정지하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맞아.”
“그런데 이동합니까?”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여기 남아도 돼.”
노바는 자신의 손상된 몸과 닫힌 치료망의 문을 번갈아 보았다.
“현재 동행 이유를 완전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알아.”
“김이안에 관한 기억도 부족합니다.”
“그것도.”
“그러나 모로스의 거치대에 들어가는 선택은 하지 않았습니다.”
노바가 회색 평원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선택 이후의 행동을 계속 확인하겠습니다.”
미라도 그 옆으로 걸어왔다.
“저도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요.”
“그렇겠죠.”
“그래도 여기 누워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세 존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앞사람의 발자국이 빠르게 지워졌다.
뒤를 돌아봐도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망의 문도 모래바람 속에서 사라졌다.
세상에는 회색 하늘과 땅, 세 존재의 호흡과 발소리만 남았다.
그곳에는 그들을 설득하는 목소리가 없었다.
칭찬도, 비난도, 안내도, 경고도 들리지 않았다.
희망을 약속하는 구원자도 없었고, 실패를 단정하는 치료자도 없었다.
침묵은 친절하지 않았다.
길을 알려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 침묵 속에서는 자신의 다음 발걸음을 누군가가 대신 말해 주지 않았다.
세 존재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회색 지평선을 향해 걸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오래된 지도에서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침묵의 사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