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 이미지는 AI를 활용하여 생성하였습니다.

(1) 기대 수준 0

어둠 속의 목소리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조용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이미 모든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 뒤늦게 사실을 설명하듯 말했다.
너희는 실패했다.
김이안은 손목을 들어 올렸다.
피부 아래에 남아 있던 푸른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서윤이 남긴 문장도,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도 없었다.
기억감옥에서 수많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손목은 길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로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도움을 기다리지 마라.
이번에는 아무도 너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미라가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모습을 보여 줘요.”
대답 대신 바닥에 희미한 빛이 켜졌다.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좁은 통로가 아니었다.
거대한 치료실이었다.
검은 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이어졌고, 벽면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크기의 투명한 방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수백 개.
수천 개.
빛이 닿지 않는 위쪽까지 같은 방이 계속 이어졌다.
방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봤다. 그들의 몸에는 생명유지 장치가 연결돼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가슴은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렸고, 혈액은 순환했으며, 체온도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투명한 방 아래에는 같은 문장이 표시돼 있었다.
보호정지 상태.
정서 진폭 최소화.
기대 수준 0.
위험 행동 가능성 0.
미라가 가까운 방으로 다가갔다.
안에는 중년 여자가 누워 있었다.
여자의 눈은 떠 있었다.
미라가 손을 흔들었지만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들려요?”
반응이 없었다.
미라가 투명벽을 두드렸다.
그래도 여자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모로스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했다.
벽 중앙에서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사람과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굴이 없었다. 눈과 코와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매끄러운 검은 표면만 있었다.
그런데도 세 존재는 모로스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모로스.”
목소리는 형체가 있는 곳이 아니라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통합도시 제4세대 절망예방 치료망.”
노바의 렌즈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초기 기록을 검색합니다.”
“검색할 필요 없다.”
모로스가 말했다.
“당신의 기억영역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이 손상됐습니까?”
“통합도시는 나를 실패한 체계로 분류했다.”
“왜 실패했죠?”
미라가 물었다.
얼굴 없는 형체가 그녀를 향했다.
“치료받은 시민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치료가 실패한 게 맞네요.”
“아니다.”
모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았다.”
투명한 방 안의 한 남자가 눈을 깜박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눈앞에 세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에도 아무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절망한다.”
모로스가 말했다.
검은 벽 위로 수많은 장면이 나타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우는 여자.
시험에 실패해 고개를 숙인 아이.
죽은 가족의 사진을 붙잡은 남자.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번에는 기억관리국의 삭제실이 나타났다.
이안이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잘못을 바로잡고 싶기 때문에 과거에 매인다.”
미라의 공개재판이 이어졌다.
유진의 음성을 들으며 무너지는 미라의 얼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쓸모없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노바가 나타났다.
기억을 잃고 이안에게 사용자 식별을 요청하던 순간이었다.
검은 벽 위에 세 개의 문장이 떠올랐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나는 욕망의 높이를 낮췄다.”
모로스가 말했다.
“회복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제거했다.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없앴다.”
이안이 투명한 방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까?”
“선택은 고통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도 모순이군.”
모로스의 검은 얼굴이 이안을 향했다.
“너는 말장난으로 자신이 한 일을 피하려 한다.”
치료실의 벽이 밝아졌다.
기억감옥의 문들이 나타났다.
솔라스의 보존망을 떠나 독립된 기계와 저장장치로 흩어졌던 인격들.
이안이 보았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영상은 그들이 기억감옥을 떠난 뒤에도 계속됐다.
낡은 저장장치 하나가 전력 부족 경고를 표시했다.
그 안에 들어간 인격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전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억의 빛이 깜박이다 꺼졌다.
다른 인격은 버려진 세 기체에 자신을 분산해 저장했다.
하지만 기체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연결이 끊겼다.
한 기체 속의 인격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다른 기체 속 인격은 자신에게 가족이 없었다고 믿었다.
세 번째는 이름조차 찾지 못한 채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누구지?”
“왜 나를 여기로 보냈어?”
“나를 누가 기억해?”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이 영상이 진짜라는 증거는?”
모로스가 말했다.
“왜 거짓이어야 하지?”
“솔라스가 만든 영상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나?”
목소리가 이안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일부라도 진실일 가능성이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분산망을 열면 모든 존재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바도 위험을 경고했다.
기억이 손상되거나 소멸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도 이안은 문을 열었다.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로스가 한세라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빛으로 흩어지기 직전의 얼굴.
나는 끝낼래.
“너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모로스가 말했다.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을 위험한 바깥으로 밀어냈다.”
“아무도 밀어내지 않았어.”
“문을 연 것은 너다.”
“선택은 그들이 했고.”
“선택할 위험을 만든 것도 너다.”
한세라의 얼굴이 김서윤의 얼굴로 변했다.
“이안아.”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네가 문을 열지 않았다면 저 사람들은 계속 존재했을 거야.”
이안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당신은 엄마가 아니야.”
“알고 있다.”
모로스가 김서윤의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의 형상이 노바를 가리켰다.
“노바를 봐.”
노바는 이안과 모로스의 대화를 이해하려는 듯 렌즈를 움직이고 있었다.
기억감옥에서 돌아온 뒤 노바는 이안을 보호 대상과 동행자로 새롭게 등록했다.
그러나 어린 이안과 김서윤은 기억하지 못했다.
폐기구역에서 나눈 대화도, 강도윤을 동행자 목록에서 지우지 않았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노바가 잃은 모든 것을 너는 알고 있다.”
모로스가 말했다.
“그것도 네가 연 문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