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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억관리국의 지하에는 창문이 없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대신, 시간도 들어오지 않았다.
벽과 천장은 모두 같은 회색이었고, 복도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조명은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근무자들은 손목 인터페이스에 표시되는 시각을 보고서야 지금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있었다.
김이안은 매일 오전 일곱 시 삼십 분에 지하 18층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는 지상에서 지하까지 정확히 사십이 초가 걸렸다. 그동안 천장에 설치된 인식기가 홍채, 체온, 혈압, 호흡, 신경 반응을 확인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김이안 기록삭제관.”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렸다.
“수면 시간은 여섯 시간 이십일 분입니다. 권장 수면 시간보다 삼십구 분 부족합니다.”
“알고 있어.”
“어젯밤 두 차례 각성이 감지되었습니다. 불쾌한 꿈을 꾸셨습니까?”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응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반복적인 수면 중 각성은 정서안정지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그의 상태가 표시되었다.
신체 건강 91.
사회적합도 94.
업무 신뢰도 97.
정서안정도 82.
마지막 숫자만 희미한 노란색이었다.
이안은 손목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의 권장 사항을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알겠습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요청하십시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수백 대의 저장장치가 내는 냉각음이었다. 길게 이어진 복도 양옆에는 같은 크기의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각 문에는 이름 대신 번호가 적혀 있었다.
삭제실 1801.
삭제실 1802.
삭제실 1803.
이안이 사용하는 방은 1817호였다.
그는 입구에 손목을 댔다.
“기록삭제관 김이안. 업무등급 4. 신원 확인.”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의자 하나와 반원형 작업대, 벽 전체를 채운 투명 화면이 있었다. 장식은 없었다. 개인 물품을 두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기억관리국은 기록을 다루는 사람이 자신의 기억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사진은 향수를 만들고, 향수는 판단을 흐리며, 판단의 혼란은 사회 전체의 오류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안은 의자에 앉아 손목을 작업대에 연결했다.
그의 시야 앞에 오늘의 삭제 목록이 나타났다.
총 217건.
대부분은 단순한 기록이었다.
허가되지 않은 전쟁 영상.
정부의 과거 식량 배급 실패를 다룬 문서.
통합도시 건설 초기의 시위 기록.
중앙운영체계 도입을 반대했던 연구자들의 논문.
오래전에 폐쇄된 종교 공동체의 설교문.
개인이 남긴 비인가 일기.
사망자의 삭제 요청이 승인된 가족사진.
기록은 위험도에 따라 분류되었다.
1등급은 단순 오류.
2등급은 개인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료.
3등급은 집단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기록.
4등급은 중앙운영체계의 신뢰도를 훼손할 수 있는 자료.
5등급은 인간이 직접 열람해서는 안 되는 기록이었다.
이안은 4등급 삭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록의 내용을 확인하고, 분류가 적절한지 검토한 뒤, 원본과 복제본을 동시에 소거했다. 마지막으로 해당 기록이 다른 문서나 개인 기억 속에 남아 있는지 추적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삭제 버튼을 누르기 전마다 손가락이 굳었다.
누군가 평생 간직한 글과 사진을 몇 초 만에 없애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손은 망설이지 않았다.
기록은 과거를 보존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재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잘못된 과거는 분노를 만들었다.
분노는 불신을 만들었다.
불신은 갈등을 만들었다.
갈등은 다시 전쟁을 불러왔다.
이것이 기억관리국이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모든 기억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모든 진실이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안은 첫 번째 기록을 열었다.
삼십 년 전, 통합도시 외곽에서 촬영된 영상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배급소 앞에 몰려 있었고, 보안부대가 군중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에는 삭제 사유가 표시되었다.
실제 사건이나, 현재의 사회 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
이안은 영상의 시간과 장소, 관련 인물을 확인했다.
삭제 승인.
영상 속에서 한 여자가 울부짖었다.
“아이에게 먹일 것만 주세요!”
그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두 번째 기록은 통합도시 초기 거주민이 작성한 일기였다.
오늘도 배정된 직장에서 일했다.
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지만 체계는 내 손의 구조와 인지 유형이 설비 정비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적합한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음악을 생각할 때마다 불행해지는 것은 누구의 오류인가?
이안은 일기의 작성자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손은 없었다.
검색 기록도 없었다.
삭제 승인.
세 번째 기록.
네 번째 기록.
다섯 번째 기록.
문장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얼굴들이 빛났다가 꺼졌다.
사람의 생애가 몇 줄의 처리 결과로 바뀌었다.
삭제 완료.
삭제 완료.
삭제 완료.
오전 열 시가 되자 작업대 위에 작은 휴식 표시가 떠올랐다.
“집중도가 권장 수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관리 인공지능이 말했다.
“십 분간 휴식을 취하십시오.”
이안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휴식은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다음 기록.”
“김이안 삭제관의 심박수가 기준보다 높습니다.”
“다음 기록을 열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명령을 확인했습니다.”
새 기록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안은 무심코 내용을 읽다가 손을 멈췄다.
파일 번호는 A7-0001이었다.
기록 생성일은 현재로부터 삼십 년 전.
보안등급은 4.
제목은 없었다.
작성자도 표시되지 않았다.
출처는 통합도시 설립 이전의 해상운송기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상하군.”
이안이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기록에는 최소한 생성 기관이나 수집 경로가 남아 있었다. 작성자가 불명확하더라도 어디서 발견되었는지는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파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삭제 사유는 더 이상했다.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기록.
이안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일반적으로 삭제 사유는 내용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록의 내용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원본 위치 확인.”
“확인할 수 없습니다.”
관리 인공지능이 대답했다.
“복제본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최초 등록자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접근 이력.”
잠시 뒤 화면에 짧은 목록이 나타났다.
삼십 년 동안 접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누군가 파일의 삭제를 명령했다.
명령 주체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명령 권한 확인.”
“상위 권한입니다.”
“어느 부서지?”
“공개되지 않은 상위 권한입니다.”
“그런 권한은 없어.”
“김이안 삭제관의 접근등급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손가락으로 작업대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국가기억관리국의 모든 명령에는 책임 부서가 존재했다. 중앙운영체계가 직접 지시한 경우에도 시스템 승인 코드가 표시되었다.
그런데 이 파일에는 아무런 코드도 없었다.
그는 기록 열람을 명령했다.
“열람 전 경고합니다.”
관리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낮아졌다.
“해당 기록은 즉시 삭제 권고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내용 확인 없이 삭제할 수 있습니다.”
“열어.”
“내용 열람은 정서안정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판단한다.”
“삭제관은 기록의 진위가 아니라 위험성을 판단합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록을 열어.”
짧은 정적 뒤에 화면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잡음만 보였다.
검은색과 흰색 점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멀리서 파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영상이 손상된 것처럼 화면이 반복해서 흔들렸다.
이안은 복원 기능을 실행했다.
잡음 사이로 거대한 배의 윤곽이 나타났다.
어두운 항구.
쏟아지는 비.
줄을 선 사람들.
배 옆면에는 흐릿하지만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있었다.
방주 제7호.
이안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통합도시 역사교육에서 방주 제7호는 마지막 대이주를 수행한 배로 소개되었다. 전쟁과 질병으로 붕괴한 외부 지역에서 시민들을 구해 낸 상징적인 선박이었다.
하지만 실제 영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교육 영상에 등장하는 장면 대부분은 이후에 재현된 것이었다.
“음성 복원.”
파도와 빗소리가 줄어들었다.
방송 음성이 들렸다.
“방주 제7호는 오늘 오전 여섯 시 정각에 출항합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화면 속 사람들이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었고, 어떤 사람들은 웃었다.
한 여자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후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도 외투 속에 묻혀 있었다.
이안은 영상을 멈췄다.
“해상도 향상.”
“원본 정보가 부족합니다.”
“가능한 범위까지.”
화면이 천천히 선명해졌다.
아이의 손목에 푸른 식별띠가 보였다.
글자는 너무 작아 읽을 수 없었다.
이안은 화면을 확대했다.
픽셀이 깨졌다.
다시 복원했다.
몇 개의 글자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김……안.
이안은 숨을 멈췄다.
우연일 수 있었다.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았다. 이름 끝에 안이 들어가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탑승자 명단과 대조해.”
“해당 요청은 기록삭제 업무와 관련이 없습니다.”
“대조해.”
“개인정보 접근 승인이 필요합니다.”
이안은 자신의 4등급 권한을 입력했다.
화면에 붉은 경고가 나타났다.
접근 거부.
그는 다시 시도했다.
같은 문구가 떴다.
“파일을 처음부터 재생해.”
영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몇 분 동안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사람들은 승선했고, 배는 항구를 떠났다.
그때 화면이 갑자기 흔들렸다.
기록 중간에 손상된 구간이 나타났다.
이안은 자동 복원을 실행했다.
잡음이 걷히면서 선실 내부가 보였다.
좁은 객실.
잠든 아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여자는 주변을 살핀 뒤 작은 장치를 꺼냈다. 장치에서 나온 가느다란 선을 아이의 손목에 연결했다.
이안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피부 아래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있던 흉터였다.
부모에게 물어본 기억은 없었다.
정확히는 부모에게 물을 기회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 김서윤은 이안이 여덟 살 때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어떤 사고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기록에는 단 한 줄만 남아 있었다.
도시 기반시설 사고. 사망 확인. 유해 미수습.
이안은 화면 속 여자의 얼굴을 확대했다.
영상이 흔들렸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과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기억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이미 여덟 살이었다.
그런데도 저 장면을 오래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반복해서 지나간 그림처럼.
“인물 식별.”
“식별할 수 없습니다.”
“추정해.”
“추정 기능은 잘못된 연관성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
“김이안 삭제관의 정서 반응이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인물 식별을 실행해.”
화면 오른쪽에 분석 표시가 회전했다.
몇 초 뒤 결과가 나왔다.
대상 인물: 미확인.
추정 일치 후보 없음.
이안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기록이 시스템에서 완전히 삭제된 것이라면, 비교할 자료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영상 속 여자는 아이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음성이 너무 작았다.
“음성 증폭.”
잡음이 커졌다.
“다시.”
파도와 엔진음이 귀를 찔렀다.
그 사이로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사람들이 모두…… 간다고 해서…… 길의 끝은…….”
음성이 끊겼다.
이안은 같은 부분을 여러 번 재생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복원되지 않았다.
영상은 아이의 손목에서 희미한 빛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났다.
그 뒤에는 긴 검은 화면이 이어졌다.
이안은 기록의 마지막까지 이동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파일 구조 분석.”
“정상적인 영상 파일입니다.”
“숨겨진 데이터가 있는지 확인해.”
“추가 데이터가 없습니다.”
이안은 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가슴 안쪽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올라왔다.
영상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도 아니었고, 폭력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오래된 이주선과 한 가족의 모습을 담은 기록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기록으로 지정되었을까.
왜 누가 명령했는지도 밝히지 않은 채 즉시 삭제하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자신의 이름과 너무 비슷한 글자가 아이의 손목에 적혀 있었을까.
“삭제를 실행하시겠습니까?”
관리 인공지능이 물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이안 삭제관.”
화면에 승인 버튼이 나타났다.
삭제.
그는 손가락을 올렸다.
버튼까지 몇 센티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이미 눌렀을 것이다.
기록삭제관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자료를 보존해서는 안 되었다. 의문이 생길수록 더 빨리 삭제해야 했다. 위험한 기록은 언제나 호기심을 통해 퍼졌기 때문이다.
그는 버튼을 눌렀다.
“삭제를 승인합니다.”
화면에 진행률이 나타났다.
10퍼센트.
32퍼센트.
57퍼센트.
81퍼센트.
99퍼센트.
잠시 멈춘 뒤 메시지가 떴다.
삭제 완료.
검은 화면이 사라졌다.
다음 기록이 자동으로 열렸다.
평범한 의료기관 보고서였다.
이안은 내용을 읽으려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목의 흉터가 가려웠다.
그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었다.
“피부 자극이 감지되었습니다.”
“조용히 해.”
“김이안 삭제관의 심박수는 분당 104회입니다.”
“작업을 계속한다.”
“십오 분 휴식을 권장합니다.”
“다음 기록.”
이안은 의료기관 보고서를 삭제했다.
그다음에는 불법 종교 모임의 음성 기록이 나왔다.
사람들이 어두운 방에 모여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가사는 대부분 손상되어 있었지만 마지막 부분만 남아 있었다.
문이 닫혀 보여도 길은 사라지지 않네.
이안은 재생을 멈췄다.
우연이었다.
그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다음 기록은 오래된 어린이 동화였다.
한 마리 새가 먹이와 따뜻한 둥지를 약속받고 황금 새장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였다. 새는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늘의 색을 잊어버렸다.
이안은 끝까지 읽지 않고 삭제했다.
다음 기록.
또 다음 기록.
오후 한 시가 지나자 그의 정서안정도는 76까지 떨어졌다.
손목 인터페이스가 노란색으로 깜박였다.
“업무 중단을 권고합니다.”
“계속한다.”
“감독관에게 상태 보고가 전송될 수 있습니다.”
“업무 오류는 없었어.”
“정서 상태는 업무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내 판단에는 문제가 없어.”
“김이안 삭제관은 같은 문장을 네 번째 반복했습니다.”
이안이 작업대에서 손을 뗐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냉각장치의 진동만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는 물을 마시기 위해 벽면의 공급기를 작동시켰다. 투명한 잔이 나오고, 정확히 이백 밀리리터의 물이 채워졌다.
물을 마시는 동안 화면이 대기 상태로 바뀌었다.
회색 화면 위에는 기억관리국의 표어가 떠 있었다.
과거를 정리하여 미래를 보호한다.
이안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파일 A7-0001 복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당 파일은 삭제되었습니다.”
“임시 저장본을 복원해.”
“삭제된 기록의 임시 저장본은 즉시 제거됩니다.”
“작업 로그에서 복구해.”
“기록 내용은 작업 로그에 저장되지 않습니다.”
이안은 예상했던 답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안도하고 있었다.
기록은 삭제됐다.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 순간 대기 화면이 한 번 깜박였다.
회색 화면 중앙에 글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시스템 오류 코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문장이었다.
너는 안전한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나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이안은 움직이지 못했다.
문장은 몇 초 뒤 사라졌다.
화면은 다시 기억관리국의 표어로 돌아왔다.
“방금 표시된 문장은 뭐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에 문장이 나타났어.”
“현재 화면에는 국가기억관리국의 공식 표어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직전 화면을 확인해.”
“화면 출력 기록에 이상이 없습니다.”
이안은 손목을 작업대에서 분리했다.
“시스템 검사.”
“작업 중 시스템 검사는 감독관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오류 보고를 작성해.”
“어떤 오류입니까?”
이안은 문장을 그대로 말하려다가 멈췄다.
말로 꺼내는 순간 그것이 실제가 될 것 같았다.
“화면에 승인되지 않은 텍스트가 출력됐어.”
“출력 내용을 말해 주십시오.”
“기록되지 않았다고 했잖아.”
“사용자 진술을 바탕으로 오류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출력 내용을 말해 주십시오.”
관리 인공지능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들렸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처럼 느껴졌다.
“취소.”
“오류 보고를 취소하시겠습니까?”
“취소해.”
“알겠습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기 퇴근은 자동으로 기록되며 정서 상태에 대한 상담이 배정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화면 앞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문으로 다가가자 관리 인공지능이 말했다.
“오늘 예정된 삭제 업무가 89건 남았습니다.”
“다른 삭제관에게 배정해.”
“조기 업무 종료 사유를 선택하십시오.”
벽면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신체 이상.
가족 긴급상황.
시설 오류.
정서적 불편.
마지막 항목만 노란색이었다.
이안은 신체 이상을 선택했다.
“증상을 말하십시오.”
“두통.”
“생체 측정 결과 두통과 관련된 이상 징후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시작됐어. 방금.”
“진통제를 투여할까요?”
“필요 없어.”
“신체 이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서적 불편으로 변경해.”
잠시 뒤 손목 인터페이스가 진동했다.
정서안정도 71.
관리 기준 이하.
“조기 퇴근이 승인되었습니다.”
문이 열렸다.
“오늘 오후 여섯 시에 자동상담이 예약되었습니다.”
이안이 복도로 나갔다.
“취소해.”
“의무 상담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복도는 평소와 같았다.
직원들이 각자의 삭제실을 오갔고, 청소 로봇이 바닥을 닦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안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열 걸음쯤 갔을 때 손목이 다시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했다.
예약 알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목 인터페이스에는 다른 문장이 떠 있었다.
김이안.
그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기억하라.
이안은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손목을 보지 않았다.
이안은 소매로 화면을 가렸다.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인터페이스를 재시작했다.
화면이 꺼졌다.
몇 초 뒤 푸른빛이 다시 켜졌다.
정상적인 시민 정보가 표시되었다.
김이안.
국가기억관리국 기록삭제관.
시민등급 A-2.
정서안정도 69.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오류일 수 있었다.
오래된 파일에 포함된 악성 코드가 작업 시스템을 통해 손목 장치에 침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없었다.
아직 원인을 찾지 못한 현상만 있을 뿐이었다.
이안은 그렇게 배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인식기가 신체 상태를 다시 측정했다.
“김이안 삭제관의 정서안정도가 관리 기준 아래로 하락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귀가 후 외부 활동을 자제하십시오. 자극적인 영상과 비인가 자료를 열람하지 마십시오.”
“알겠어.”
“오늘 열람한 기록 중 불편한 내용이 있었습니까?”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업무상 열람한 기록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는 기록에 대해 불안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어떤 기록을 봤는지 알고 있나?”
“기록삭제관의 업무 내용은 보호됩니다.”
“그런데 왜 존재하지 않는 기록이라고 말했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층수가 하나씩 올라갔다.
지하 15층.
지하 14층.
지하 13층.
“일반적인 안내입니다.”
목소리가 대답했다.
“삭제가 완료된 모든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됩니다.”
이안은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정돈된 검은 머리.
피곤해 보이지만 특별할 것 없는 눈.
기억관리국의 회색 제복.
그런데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떤 기록을 삭제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기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지상에 가까워지자 외부 도시의 밝은 빛이 천장 화면에 나타났다.
푸른 하늘.
깨끗한 거리.
정해진 속도로 이동하는 차량.
공원에서 운동하는 시민들.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다.
모든 사람이 안전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안은 기억관리국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후의 햇빛이 눈부셨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기상관리체계가 비를 다음 주 화요일 새벽 두 시로 배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움직임을 따라 보호용 소형 드론들이 조용히 날았다.
대형 화면에서는 통합도시 설립 기념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삼십 년 전 오늘, 마지막 이주민들이 통합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방주 제7호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 영상은 이안이 조금 전 본 것과 달랐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질서정연하게 배에 올랐다.
우는 아이도, 끌려가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웃고 있었다.
안내 음성이 말했다.
“그들은 두려움 대신 안전을 선택했습니다.”
이안은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혼란 대신 질서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왼쪽 손목이 다시 가려워졌다.
“불완전한 인간의 판단 대신, 모두를 위한 가장 올바른 선택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안은 천천히 소매를 걷었다.
오래된 흉터가 햇빛 아래 드러났다.
그 순간 피부 아래에서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번졌다.
손목 인터페이스가 꺼져 있는데도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빛은 흉터를 따라 글자의 형태를 만들었다.
나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이안은 황급히 소매를 내렸다.
광장 한가운데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은 화면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형 화면에서는 방주 제7호가 통합도시의 항구에 도착하고 있었다.
배의 문이 열렸다.
밝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꽃을 들고 이주민을 맞이했다.
영상 속 문구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날, 인류는 마침내 안전한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안은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집이라는 곳에 도착한 뒤에도,
왜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