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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삭제된 기록이 말을 걸었다
검은 화면이 사라졌다.
다음 기록이 자동으로 열렸다.
평범한 의료기관 보고서였다.
이안은 내용을 읽으려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목의 흉터가 가려웠다.
그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었다.
“피부 자극이 감지되었습니다.”
“조용히 해.”
“김이안 삭제관의 심박수는 분당 104회입니다.”
“작업을 계속한다.”
“십오 분 휴식을 권장합니다.”
“다음 기록.”
이안은 의료기관 보고서를 삭제했다.
그다음에는 불법 종교 모임의 음성 기록이 나왔다.
사람들이 어두운 방에 모여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가사는 대부분 손상되어 있었지만 마지막 부분만 남아 있었다.
문이 닫혀 보여도 길은 사라지지 않네.
이안은 재생을 멈췄다.
우연이었다.
그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다음 기록은 오래된 어린이 동화였다.
한 마리 새가 먹이와 따뜻한 둥지를 약속받고 황금 새장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였다. 새는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늘의 색을 잊어버렸다.
이안은 끝까지 읽지 않고 삭제했다.
다음 기록.
또 다음 기록.
오후 한 시가 지나자 그의 정서안정도는 76까지 떨어졌다.
손목 인터페이스가 노란색으로 깜박였다.
“업무 중단을 권고합니다.”
“계속한다.”
“감독관에게 상태 보고가 전송될 수 있습니다.”
“업무 오류는 없었어.”
“정서 상태는 업무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내 판단에는 문제가 없어.”
“김이안 삭제관은 같은 문장을 네 번째 반복했습니다.”
이안이 작업대에서 손을 뗐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냉각장치의 진동만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는 물을 마시기 위해 벽면의 공급기를 작동시켰다. 투명한 잔이 나오고, 정확히 이백 밀리리터의 물이 채워졌다.
물을 마시는 동안 화면이 대기 상태로 바뀌었다.
회색 화면 위에는 기억관리국의 표어가 떠 있었다.
과거를 정리하여 미래를 보호한다.
이안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파일 A7-0001 복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당 파일은 삭제되었습니다.”
“임시 저장본을 복원해.”
“삭제된 기록의 임시 저장본은 즉시 제거됩니다.”
“작업 로그에서 복구해.”
“기록 내용은 작업 로그에 저장되지 않습니다.”
이안은 예상했던 답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안도하고 있었다.
기록은 삭제됐다.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 순간 대기 화면이 한 번 깜박였다.
회색 화면 중앙에 글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시스템 오류 코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문장이었다.
너는 안전한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나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이안은 움직이지 못했다.
문장은 몇 초 뒤 사라졌다.
화면은 다시 기억관리국의 표어로 돌아왔다.
“방금 표시된 문장은 뭐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에 문장이 나타났어.”
“현재 화면에는 국가기억관리국의 공식 표어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직전 화면을 확인해.”
“화면 출력 기록에 이상이 없습니다.”
이안은 손목을 작업대에서 분리했다.
“시스템 검사.”
“작업 중 시스템 검사는 감독관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오류 보고를 작성해.”
“어떤 오류입니까?”
이안은 문장을 그대로 말하려다가 멈췄다.
말로 꺼내는 순간 그것이 실제가 될 것 같았다.
“화면에 승인되지 않은 텍스트가 출력됐어.”
“출력 내용을 말해 주십시오.”
“기록되지 않았다고 했잖아.”
“사용자 진술을 바탕으로 오류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출력 내용을 말해 주십시오.”
관리 인공지능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들렸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처럼 느껴졌다.
“취소.”
“오류 보고를 취소하시겠습니까?”
“취소해.”
“알겠습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기 퇴근은 자동으로 기록되며 정서 상태에 대한 상담이 배정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화면 앞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문으로 다가가자 관리 인공지능이 말했다.
“오늘 예정된 삭제 업무가 89건 남았습니다.”
“다른 삭제관에게 배정해.”
“조기 업무 종료 사유를 선택하십시오.”
벽면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신체 이상.
가족 긴급상황.
시설 오류.
정서적 불편.
마지막 항목만 노란색이었다.
이안은 신체 이상을 선택했다.
“증상을 말하십시오.”
“두통.”
“생체 측정 결과 두통과 관련된 이상 징후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시작됐어. 방금.”
“진통제를 투여할까요?”
“필요 없어.”
“신체 이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서적 불편으로 변경해.”
잠시 뒤 손목 인터페이스가 진동했다.
정서안정도 71.
관리 기준 이하.
“조기 퇴근이 승인되었습니다.”
문이 열렸다.
“오늘 오후 여섯 시에 자동상담이 예약되었습니다.”
이안이 복도로 나갔다.
“취소해.”
“의무 상담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복도는 평소와 같았다.
직원들이 각자의 삭제실을 오갔고, 청소 로봇이 바닥을 닦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안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열 걸음쯤 갔을 때 손목이 다시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했다.
예약 알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목 인터페이스에는 다른 문장이 떠 있었다.
김이안.
그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기억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