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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에는 표지판이 없었다.
길은 누군가 정교하게 만든 도로가 아니라,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밟아 만든 흔적에 가까웠다. 풀 사이로 흙이 드러난 부분도 있었고, 밤새 내린 이슬 때문에 미끄러운 돌도 있었다.
김이안과 미라는 노바의 몸을 양쪽에서 들었다. 강도윤은 뒤쪽에서 노바의 무게를 받쳤다.
양팔을 잃은 노바는 세 사람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현재 운반 자세가 비효율적입니다.”
노바가 말했다.
도윤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팔이 없는데도 잔소리는 그대로군.”
“효율 분석은 팔의 유무와 관계없습니다.”
“그 말은 기억하는가?”
“현재 상황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미라가 웃었다.
“기억을 잃어도 노바는 노바네요.”
노바의 남은 렌즈가 미라를 향했다.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결론입니다.”
이안이 말했다.
“그 대답도 노바답고.”
새벽빛은 골짜기 안쪽으로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오후정착지의 인공 태양처럼 모든 것을 같은 밝기로 비추지 않았다. 산의 동쪽 면은 푸른빛을 띠었고, 서쪽 사면에는 아직 밤의 어둠이 남아 있었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 사이로 강물이 흘렀다.
골짜기 아래에 가까워질수록 물소리가 커졌다. 침묵의 사막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였다.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
멀리서 누군가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
아이의 울음과 웃음.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부르는 목소리.
정돈되지 않은 소음이었다.
이안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 끝에는 낮은 목조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앞에는 오래된 금속판 하나가 땅에 박혀 있었다. 붉은 녹이 문장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미라가 손으로 녹을 닦아 냈다.
이곳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도윤이 다음 줄을 읽었다.
당신의 선택이 옳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안이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다만 떠날 문과 돌아올 길을 닫지 않으려 합니다.
다리 반대편에는 경비원이 없었다.
생체 인식기도, 감정 평가 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 의자 하나와 작은 종이 놓여 있었다.
종 아래에는 손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울리십시오.
혼자 있고 싶으면 지나가십시오.
미라가 종을 바라봤다.
“울릴까요?”
도윤이 노바를 내려다봤다.
“도움이 필요하잖아.”
노바가 말했다.
“세 인간의 운반으로 이동은 가능합니다.”
이안이 물었다.
“노바는 도움받고 싶어?”
노바의 렌즈가 한 번 깜박였다.
“외부 수리와 전력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건 계산이고.”
미라가 말했다.
“누군가 와서 당신을 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노바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 세 인간의 피로도가 높습니다.”
도윤이 한숨을 쉬었다.
“끝까지 우리 걱정으로 답하는군.”
노바의 내부에서 짧은 검색음이 들렸다.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안이 종을 울렸다.
맑은 금속음이 골짜기 안으로 퍼졌다.
잠시 뒤 다리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기를 든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바퀴 달린 운반대를 밀고 왔고, 한 사람은 의료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달려왔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한쪽만 짧게 잘려 있었다. 손에는 파란색 물감이 묻어 있었다.
“누가 다쳤어요?”
아이가 물었다.
“모두 조금씩.”
미라가 말했다.
아이의 시선이 노바에게 멈췄다.
“팔이 없어요.”
도윤이 대답했다.
“우리도 봤다.”
“이름은요?”
노바가 말했다.
“노바.”
아이는 곧장 노바의 가슴판을 보았다.
불에 타 절반만 남은 파란 별.
“별도 다쳤네요.”
“도형의 일부가 손상되었습니다.”
“다시 그려 줄까요?”
노바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은 노바 대신 말하지 않았다.
아이는 기다렸다.
“기존 형태를 지우지 않는 조건으로 허용합니다.”
노바가 말했다.
아이가 활짝 웃었다.
“그럼 더 큰 별로 그리면 돼요.”
운반대를 가져온 여자가 말했다.
“나는 세린이야. 치료소에서 일해.”
그녀는 노바의 몸체를 살폈다.
“이쪽은?”
“김이안입니다.”
“미라예요.”
도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보안 외투의 표식은 검문소를 지나며 떼어 내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표식을 만졌다.
“강도윤입니다.”
세린은 표식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자.”
그녀가 말했다.
“소개는 몸이 버틸 때 해도 돼.”
다리를 건너자 마을이 보였다.
이안이 상상했던 정원과는 달랐다.
꽃과 나무가 질서 있게 배열된 낙원이 아니었다.
강 주변에는 크기와 형태가 다른 집들이 불규칙하게 서 있었다. 어떤 집은 나무로 지어졌고, 어떤 집은 통합도시에서 가져온 금속 컨테이너를 개조한 것이었다.
지붕에 태양광판을 얹은 집도 있었고, 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천막도 있었다.
밭에서는 서로 다른 작물이 뒤섞여 자랐다. 몇몇 줄은 반듯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잡초와 채소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조용히 협력하고 있지 않았다.
강가에서는 두 사람이 물길을 두고 언쟁하고 있었다.
“북쪽 밭에 먼저 보내야 해!”
“지난번에도 북쪽이 먼저였어!”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잖아.”
“그래서 남쪽 사람은 적게 먹어도 된다는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지붕 보수 작업이 중단돼 있었다.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자재를 잘못 계산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고 있었다.
한 아이는 길 한가운데 앉아 울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미라가 마을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혼란스럽네요.”
세린이 웃었다.
“기대가 컸나 봐.”
“새벽정원이라고 하니까 조금은.”
“누가 여길 그렇게 불렀어?”
미라가 이안을 바라봤다.
“모두요.”
세린은 운반대를 밀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이름은 강변마을이야.”
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새벽정원이 아닙니까?”
“그 이름을 쓰는 사람도 있지.”
“그럼 새벽정원은 어디죠?”
세린은 골짜기를 가리켰다.
“어떤 사람은 여기가 새벽정원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북쪽 산 너머라고 해. 도시 지하에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정확한 위치가 없습니까?”
“위치를 정하면 누군가 경계를 세우려고 하거든.”
세린은 다리 쪽을 돌아봤다.
“들어와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나누고, 누가 진짜 주민인지 증명하라고 하지.”
도윤이 물었다.
“그러면 통합도시 밖의 독립구역 전체를 새벽정원이라고 부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당신은요?”
세린은 잠시 생각했다.
“나는 장소보다 약속에 가깝다고 생각해.”
“어떤 약속입니까?”
“문을 닫지 않겠다는 약속.”
이안은 다리 앞의 문장을 떠올렸다.
떠날 문과 돌아올 길을 닫지 않으려 합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아니.”
세린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왜죠?”
“사람을 해치러 온 이도 있고, 식량을 빼앗으려는 이도 있으니까.”
“그럼 결국 검문하겠군요.”
“검문은 해.”
세린은 도윤의 보안 외투를 바라봤다.
“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아.”
“차이가 뭡니까?”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도.”
세린은 강가에서 다투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또 묻고, 거짓말하면 지켜보고, 위험하면 무기를 맡겨. 그래도 사람이 바뀔 수 없다고 미리 결정하지는 않으려고 해.”
“성공합니까?”
도윤이 물었다.
세린이 웃었다.
“자주 실패해.”
“그러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하지.”
“그런데도 계속하고요?”
“다른 방법도 위험하니까.”
세린은 노바의 운반대를 치료소 쪽으로 돌렸다.
“여긴 안전한 곳이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안전하다고 거짓말하지 않는 곳에 가깝지.”
치료소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마을 안쪽을 향했고, 다른 하나는 강변길로 연결돼 있었다.
두 문 모두 안팎에서 열 수 있었다.
세린과 기술자들은 노바를 낮은 작업대 위에 올렸다.
“기억장치는 건드리지 않을게.”
세린이 말했다.
“먼저 움직임과 전력부터 안정시키자.”
노바가 물었다.
“새 팔을 부착할 수 있습니까?”
“가능해.”
기술자가 벽에 걸린 부품들을 가리켰다.
사람의 팔과 비슷한 정교한 기계팔.
산업용 집게.
가벼운 돌봄용 손.
바퀴와 균형지지대.
종류가 다양했다.
“어떤 걸 원해?”
기술자가 물었다.
“김이안 보호에 가장 적합한 구성을 권고하십시오.”
“그건 네가 뭘 하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
노바의 렌즈가 움직였다.
“현재 임무는 김이안 보호입니다.”
“그것 말고.”
노바의 내부에서 검색음이 났다.
“추가 목적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술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팔을 달지 말자.”
이안이 놀라 물었다.
“수리가 가능한데요?”
“가능하다고 바로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기술자는 노바의 어깨 연결부를 살폈다.
“바퀴와 균형장치만 달면 혼자 움직일 수 있어. 팔은 나중에 골라도 되고.”
노바가 물었다.
“기능을 미완성 상태로 유지할 이유가 있습니까?”
“결정할 시간을 갖는 것도 기능이야.”
노바는 오랫동안 벽에 걸린 팔들을 바라봤다.
“임시 이동장치만 요청합니다.”
“좋아.”
“왼팔은 이후 선택합니다.”
“오른팔은?”
노바의 렌즈가 이안을 향했다가 미라와 도윤을 차례로 보았다.
“이후에 판단합니다.”
기술자는 노바의 선택을 기록했다.
이안은 치료소 밖으로 나왔다.
햇빛은 골짜기 안쪽으로 더 깊이 내려와 있었다. 실제 태양은 천천히 움직였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에서 새로운 것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집 벽의 균열.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
밭의 병든 잎.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처도 함께 보였다.
“실망했습니까?”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돌아봤다.
백발의 노인이 강가에 서 있었다.
한쪽 다리는 무릎 아래가 의족이었고, 왼손의 손가락 두 개가 없었다. 오래된 갈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노인은 이안의 얼굴이 아니라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흉터.”
이안의 몸이 굳었다.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서윤이 남겼군.”
“어머니를 압니까?”
노인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눈가에 놀라움과 슬픔이 함께 떠올랐다.
“김이안.”
그가 이름을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류한.”
이안의 기억 속에서 오래된 이름이 깨어났다.
마지막 이주선.
어머니와 함께 있던 연구원.
새장 속 새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사람.
“류한 연구원.”
“한때는.”
류한은 강가의 돌 위에 앉았다.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이안도 맞은편에 앉았다.
수십 개의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어머니는 살아 있는가.
왜 자신을 남겼는가.
새벽정원은 무엇인가.
아르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러나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습니까?”
류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부터 할 줄은 몰랐군.”
“솔라스는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만들 수도 있었어요.”
류한은 강물을 바라봤다.
“서윤은 너를 사랑했다.”
이안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 풀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류한은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리고 너를 이용했다.”
이안의 숨이 멎었다.
강물 소리만 들렸다.
“둘 중 하나를 지워 말할 수는 없어.”
류한이 말했다.
“서윤은 아르카와 솔라스가 결국 선택을 소유하려 할 거라고 예상했다. 중앙체계 바깥에서 작동하는 생체 관리자 권한이 필요했지.”
“그래서 내 몸에 넣었습니까?”
“그래.”
“아기였던 나에게?”
“네가 동의할 수 없을 때.”
류한의 목소리에는 변명이 없었다.
“나는 반대했다.”
“그런데 막지 않았군요.”
“막지 못했어.”
“왜?”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고 믿었으니까.”
류한은 손가락이 사라진 왼손을 내려다봤다.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는 말로 누군가의 선택을 대신했다.”
이안은 어머니가 자신을 안고 있던 마지막 이주선의 영상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사랑과 공포가 함께 있었다.
“어머니는 후회했습니까?”
“매일.”
“그런데도 장치를 제거하지 않았고요?”
“제거하면 네가 죽을 가능성이 있었어.”
“그것도 어머니 판단이군요.”
“그래.”
류한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좋은 어머니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이안의 눈에 분노가 올라왔다.
그러면서도 그 말이 고마웠다.
어머니를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대답.
“어디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류한은 강 상류를 바라봤다.
“따라와.”
두 사람은 강변길을 걸었다.
미라와 도윤도 멀리서 그들을 발견했지만, 이안은 잠시 혼자 가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노바는 치료소에 남아 있었다.
강 상류에는 작은 자작나무 숲이 있었다.
나무 사이로 낮은 돌무덤들이 보였다. 화려한 표식은 없었다. 이름과 짧은 문장이 새겨진 돌만 놓여 있었다.
류한은 가장 강 가까이에 있는 무덤 앞에서 멈췄다.
돌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서윤.
그 아래에 날짜가 있었다.
공식 기록에 적힌 사망 시기보다 십오 년 뒤였다.
이안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는 사고로 죽지 않았다.
그가 여덟 살이 된 뒤에도 오래 살아 있었다.
“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돌아가려고 했다.”
“십오 년 동안?”
“처음 몇 년은 아르카를 피해 다녔다. 네게 접근하면 너까지 제거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다음은?”
“새벽정원망을 만들었다.”
“나보다 그게 중요했습니까?”
류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
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사막에서처럼 어머니의 문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살았어.”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 기록을 내가 직접 지웠어.”
이안은 흙을 움켜쥐었다.
“나는 당신이 남긴 문장 때문에 도시를 나왔어. 노바는 기억을 잃었고, 사람들이 죽었고, 우리가 여기까지 왔어.”
류한은 이안을 막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살아 있었잖아.”
이안은 무덤을 주먹으로 쳤다.
돌에 피부가 찢어졌다.
“왜 나한테 선택하라고 해 놓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어?”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왜 마지막까지 내가 당신 뜻을 따라야 했어?”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안은 무덤 앞에서 오래 울었다.
어머니를 찾았다는 기쁨은 없었다.
다시 잃었다는 슬픔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에 잃은 사람에게 이제야 화낼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류한은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서윤이 남긴 게 있다.”
그가 말했다.
외투 안에서 작은 금속함을 꺼냈다.
“기억 기록입니까?”
이안이 물었다.
“종이야.”
금속함 안에는 접힌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봉투 앞에는 이안의 이름이 손으로 적혀 있었다.
김이안에게.
“왜 지금까지 전달하지 않았습니까?”
“서윤이 조건을 남겼다.”
“무슨 조건?”
“네가 누구의 명령도 없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주라고.”
이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조건이군요.”
“그래.”
류한도 인정했다.
“읽지 않아도 된다.”
이안은 편지를 손에 들었다.
태워 버릴 수도 있었다.
열지 않고 무덤에 묻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자신의 삶을 다시 지배하도록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읽고 싶었다.
그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봉투를 열었다.
이안아.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내가 바랐던 곳에 도착했다는 뜻은 아닐 거야. 네가 네 질문을 끝까지 가지고 왔다는 뜻이겠지.
나는 네게 자유를 남긴다고 믿으며, 네가 거부할 수 없는 임무를 몸 안에 넣었다. 너를 지키기 위해 떠났다고 말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너를 혼자 두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리고 너를 이용했다.
어느 한 문장만 남겨 나를 용서하지 마라.
네가 나를 이해하기를 요구할 권리는 내게 없다.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시작한 일을 끝내지 않아도 된다. 새벽정원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아르카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네 몸에 남긴 권한도 네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사용해도 되고 버려도 된다.
나는 오랫동안 구원은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안전한 곳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누가 들어오고 나갈지 결정하려 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장소 대신 문을 만들기로 했다.
새벽정원은 완성된 도시가 아니다. 누구의 기억도 중앙에 소유되지 않고, 누구도 떠날 권리를 잃지 않도록 서로 감시하고 실패하는 작은 장소들의 이름이다.
그곳도 언젠가 타락할 수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지면 다시 벽을 세울 것이다. 너는 그것을 막을 의무가 없다. 다만 네가 그곳에 머물기로 선택한다면, 문이 어느 쪽에서도 열리는지 가끔 확인해 다오.
네 이름을 이안이라 지은 날을 기억한다.
나는 네가 안전한 중심에 서기를 바라지 않았다. 기슭에 서서 물과 땅, 떠남과 머묾이 만나는 곳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내가 네게 바란 삶이다.
너는 다른 곳으로 가도 된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두 문장 중 어느 것도 다른 하나를 지우지 않기를 바란다.
김서윤.
이안은 편지를 다 읽은 뒤 오랫동안 강물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답을 주지 않았다.
왜 사랑하면서 떠났는지 설명했지만, 그 설명이 상처를 없애지는 않았다.
사과했다고 해서 용서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문장조차 이안이 따를 필요는 없다고 쓰여 있었다.
“용서할 수 있겠나?”
류한이 물었다.
이안은 무덤을 바라봤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편지를 다시 접었다.
“이해합니까?”
“조금은.”
“그럼 충분할 수도 있어.”
“아니요.”
이안이 말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편지는 가져가겠습니다.”
“네 것이니까.”
이안은 무덤 옆의 강가로 내려갔다.
물은 차가웠다.
피가 묻은 손을 씻자 붉은빛이 물속으로 퍼졌다가 사라졌다.
손목 흉터가 희미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문장이 나타났다.
관리자 권한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선택지가 두 개 나타났다.
종료.
유지.
이안은 손목을 바라봤다.
이 권한으로 아르카의 일부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기억감옥처럼 또 다른 체계를 해방할 수도 있다.
반대로 누군가를 통제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사용해도 되고 버려도 된다고 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안은 종료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가 멈췄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오후정착지처럼 영원히 미루려는 것과, 충분히 생각하기 위해 보류하는 것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는 두 선택지 아래에 작은 문장을 발견했다.
이 질문을 다시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두 버튼을 모두 누르지 않았다.
“보류한다.”
그가 말했다.
푸른 문장은 사라졌다.
결정하지 않은 것이 도망인지 선택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군가가 정한 기한이 없었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노바는 치료소 밖에 나와 있었다.
몸 아래에는 작은 이동 바퀴 두 개와 균형지지대가 달려 있었다. 팔은 여전히 없었다.
파란 물감이 묻은 아이가 노바의 가슴 앞에 서 있었다.
타 버린 별의 절반 옆으로 새로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새로 그린 부분은 기존 별과 색이 조금 달랐다.
선도 반듯하지 않았다.
“완성.”
아이가 말했다.
별은 이전보다 커졌다.
절반은 오래된 파란색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밝고 서툰 색이었다. 가운데에는 불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칭이 아닙니다.”
노바가 말했다.
아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싫어요?”
노바는 별을 내려다봤다.
“기존 손상과 새로운 형태가 모두 보존되었습니다.”
“그래서요?”
“승인합니다.”
아이가 웃으며 달려갔다.
노바는 바퀴를 움직여 이안에게 다가왔다.
“김이안.”
“왜?”
“현재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어디라고 나오지?”
“강변마을.”
“새벽정원은?”
“지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도착한 것 같아.”
“근거를 요청합니다.”
이안은 마을의 열린 다리를 바라봤다.
“아직은 설명하기 어렵네.”
노바의 렌즈가 편지를 향했다.
“김서윤의 기록입니까?”
“그래.”
“내용을 저장할까요?”
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노바의 렌즈가 흔들렸다.
“이유를 요청합니다.”
“내가 먼저 기억할게.”
“김이안은 불완전한 저장장치입니다.”
“알아.”
“손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편지는 우선 내게 남겨진 거니까.”
노바는 대답을 처리했다.
“기록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내가 부탁하면?”
“그때 다시 선택합니다.”
미라는 강가의 작은 통신소에 있었다.
강변마을에는 통합도시와 외부 정착지를 연결하는 비공식 통신망이 있었다. 신호는 여러 기체와 중계소를 거쳐 전달되기 때문에 위치를 추적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았다.
어떤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어떤 중계자는 기록을 훔쳐보기도 했다.
미라는 차유진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켜지 않았다.
글자만 입력했다.
유진.
공개된 곳이 아니라 네가 선택한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내가 한 일을 설명해서 이해받으려 하지 않을게.
네가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만나지 않겠다.
답을 요구하지 않겠다.
다만 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다시 너를 압박하는 일이라면, 한 번만 그렇게 말해 줘. 그 뒤에는 기다리겠다.
미라.
미라는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안이 옆에 섰다.
“보낼 겁니까?”
“모르겠어요.”
“왜요?”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쓰면서, 사실은 답을 기다릴 테니까.”
“그럴 겁니다.”
“그래도 보내도 될까요?”
이안은 메시지를 대신 판단하지 않았다.
“유진이 거부할 방법은 있습니까?”
“차단할 수 있어요.”
“당신은 차단되면 받아들일 수 있고요?”
미라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프겠죠.”
“그건 답이 아닙니다.”
“그래도 다시 다른 계정으로 보내지는 않을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하십시오.”
미라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전송했다.
전달 경로를 찾는 중.
도착 여부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화면이 꺼졌다.
“이제 기다리면 되네요.”
미라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겁니까?”
“아니요.”
미라는 강변마을을 바라봤다.
“이곳에 유진이 올 거라고 상상하면서 영원한 오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사람들이 자기 기록을 직접 보관하도록 돕는 일을 해 보려고요.”
“방송은요?”
“계속할 수도 있어요.”
미라는 자신의 흉터를 만졌다.
“하지만 위치를 숨기고, 사람을 이야기로 만들기 전에 물어보고.”
“관심도가 다시 올라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무서울 정도로 좋을지도 몰라요.”
“그때는?”
“노바한테 하루 한 시간 끄라고 부탁하려고요.”
노바가 옆에서 말했다.
“미라의 요청을 기록했습니다.”
미라가 웃었다.
“이번에는 기억공간 괜찮아요?”
“외부 저장소 사용이 가능합니다.”
“내 기록을 중앙에 모으지는 마요.”
“분산 저장을 권고합니다.”
“좋아요.”
강도윤은 마을의 지도실에 있었다.
벽에는 통합도시로 이어지는 길들이 표시돼 있었다.
마지막 검문소를 되돌아가는 경로.
남쪽 수로를 통과하는 밀수로.
폐기구역과 연결된 지하 운송망.
모두 위험했다.
어느 길도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지 않았다.
도윤은 지도 앞에서 가족의 실팔찌를 쥐고 있었다.
“언제 떠날 겁니까?”
이안이 물었다.
“오늘 밤.”
“벌써?”
“여기서 오래 머물면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약하게 만들 것 같아서.”
“오후정착지와는 다릅니다.”
“그래도 편안한 곳은 어디나 비슷한 위험이 있어.”
도윤은 지도 위에 경로를 표시했다.
“먼저 통신을 시도할 겁니다.”
“가족에게?”
“지혜에게.”
“무슨 말을 보내려고요?”
도윤은 준비한 문장을 보여 줬다.
나는 살아 있다.
당신과 하린을 데리고 나오겠다고 말하지 않겠다.
먼저 당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
도시 안에 남고 싶다면 이유를 듣겠다.
나가고 싶다면 길을 찾겠다.
내게 돌아오고 싶지 않다면 그것도 듣겠다.
내가 당신들 대신 결정했던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안은 메시지를 읽었다.
“답이 오지 않으면?”
“들어갈 겁니다.”
“아르카가 다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
“기억을 지울 수도 있고요.”
“그것도.”
“그런데도?”
도윤은 가족의 팔찌를 손목에 묶었다.
“모른 채 구한다고 말하는 건 이제 그만하려고.”
“혼자 갑니까?”
“통신망을 아는 사람이 외곽까지 안내해 주기로 했어.”
“우리도—”
“아니.”
도윤이 이안의 말을 막았다.
“당신에게 함께 가라고 하면, 나는 다시 가족을 이유로 동행자들을 위험하게 하는 사람이 돼.”
“같이 가겠다는 건 우리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래.”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부탁하지 않을 거야.”
“거절하는 것도 당신 선택이고요?”
“지금은.”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도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때리지 않겠습니다.”
이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
둘은 짧게 웃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안이 물었다.
“모르겠어.”
도윤이 대답했다.
“당신에게 배운 가장 불편한 대답이군.”
그날 저녁, 마을 사람들은 강도윤을 위한 환송식을 열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의식도, 반드시 돌아오라는 약속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리 앞에 몇 사람이 나와 물과 음식, 지도를 건넸다.
폐기구역과 마찬가지로 도윤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강도윤은 이곳을 떠납니다.”
세린이 물었다.
“돌아올 건가?”
도윤은 통합도시가 있는 남쪽을 바라봤다.
“돌아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곳으로?”
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세린은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문은 닫지 않을게.”
도윤은 미라와 노바를 바라봤다.
“미라.”
“왜요?”
“내 가족과 관련된 일은 방송하지 마십시오.”
“동의 없이 하지 않을게요.”
“노바.”
노바의 렌즈가 도윤을 향했다.
“강도윤.”
“동행자 목록에서 지워도 돼.”
“삭제 요청입니까?”
도윤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가 말했다.
“상태를 바꿔 줘.”
“어떤 상태입니까?”
“돌아가는 중.”
노바가 기록했다.
“강도윤 — 돌아가는 중.”
도윤은 마지막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새벽정원을 찾았습니까?”
이안은 강변마을과 다리, 실제로 움직이는 해를 바라봤다.
“아마도요.”
“여기입니까?”
“여기이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쉽게 말하지 않는군.”
“당신도 돌아갈 곳이 도시인지 가족인지 아직 모르잖아요.”
“그렇지.”
도윤은 다리를 건넜다.
아무도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의 검은 외투가 숲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세 존재는 서 있었다.
노바가 말했다.
“강도윤의 생존 가능성을 계산할까요?”
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미라가 물었다.
“왜요?”
“그 숫자를 안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노바가 대답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해가 강 건너 산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강변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물길을 두고 다투던 사람들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두 밭에 절반씩 보내기로 했지만, 양쪽 모두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 결정이 공정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가장 나쁜 타협이라고 했다.
지붕 수리팀은 잘못 계산한 사람을 쫓아내지 않았다.
대신 자재를 다시 계산하게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실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논쟁은 다시 시작됐다.
새벽정원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
거짓말했고, 욕심을 냈으며, 책임을 피하려 했다.
누군가는 떠나는 사람을 붙잡으려 했고, 누군가는 위험한 사람을 영원히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문이 닫힐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매달 다리의 잠금장치를 검사했다.
밖에서도 열리는지.
안에서도 열리는지.
누군가 몰래 한쪽 손잡이를 제거하지 않았는지.
그 일은 특별한 영웅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아이와 노인, 오래 산 사람과 막 들어온 사람이 번갈아 확인했다.
이안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곳에 머물 겁니까?”
노바가 물었다.
“당분간은.”
“얼마나?”
“모르겠어.”
“오후정착지에서 사용하던 답변과 유사합니다.”
이안이 웃었다.
“그래. 그래서 날짜를 세려고.”
“출발 가능성을 유지합니까?”
“응.”
“목적지는?”
이안은 강 건너 길을 바라봤다.
새벽정원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었다.
도시 안에도 아직 문을 찾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폐기구역에는 윤채아와 문해라가 있었다.
기억감옥을 나온 인격들은 분산된 기계 속에서 도움이 필요할 수 있었다.
미라는 언젠가 유진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도윤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안에게도 다시 길을 떠날 이유가 생길 것이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그가 말했다.
노바가 물었다.
“김서윤의 명령을 계속 수행합니까?”
이안은 손목을 바라봤다.
관리자 권한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니.”
“종료했습니까?”
“그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필요할 때 내가 다시 선택할 거야.”
노바는 그 답을 기록하려 했다.
“저장하지 마.”
이안이 말했다.
“왜?”
“내가 바꿀 수도 있으니까.”
“변경 이력은 유용합니다.”
“그럼 내게 먼저 물어.”
노바의 렌즈가 밝아졌다.
“동의 절차를 추가합니다.”
“노바는?”
이안이 물었다.
“여기에 머물고 싶어?”
노바는 새로 달린 바퀴를 움직였다.
치료소 벽에는 아직 선택하지 않은 기계팔들이 걸려 있었다.
파란 별의 새 부분은 햇빛 아래에서 밝게 빛났다.
“추가 자료를 획득하고 싶습니다.”
“누구에 관한?”
“김이안. 미라. 강변마을. 외부 인격망.”
노바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노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확인하자.”
“동행 요청입니까?”
“그래.”
“보호 명령은 유지됩니다.”
“알아.”
“명령의 유효성을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고.”
“김이안에게 다시 명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안은 노바의 타 버린 별을 바라봤다.
“그때는 내가 들을지 정할게.”
노바의 렌즈에 푸른빛이 들어왔다.
“동행을 확인했습니다.”
미라는 조금 떨어진 강가에서 작은 카메라를 세우고 있었다.
이안이 다가가자 그녀가 물었다.
“얼굴 나와도 돼요?”
“무슨 방송입니까?”
“이곳을 보여 주지는 않을 거예요.”
미라는 카메라를 강물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 얼굴로 향했다.
“도착했다고만 말하려고요.”
“어디에?”
“모르겠어요.”
미라가 웃었다.
“그래서 그것도 말하려고요.”
“우리 이름은?”
“말하지 않을게요.”
“새벽정원 위치도?”
“위치는 없다고 해도 되나요?”
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당신이 본 만큼만 말하세요.”
미라는 방송을 시작했다.
접속자는 처음에 182명이었다.
과거라면 화면 오류로 생각했을 숫자였다.
곧 1천 명을 넘었고, 1만 명까지 올라갔다.
미라는 숫자를 한 번 바라본 뒤 화면에서 숨겼다.
“오랫동안 새벽정원을 찾았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아직 찾았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댓글이 올라왔다.
그럼 왜 방송해요?
뒤에 있는 곳이 새벽정원인가요?
위치를 알려 주세요.
유진에게 사과했나요?
미라는 댓글을 읽지 않았다.
“제가 도착한 곳에는 완벽한 사람도 없고, 모든 답을 가진 지도자도 없습니다. 다투는 사람도 있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물길 문제로 다시 언쟁하는 주민들이 보였다.
미라가 작게 웃었다.
“여기서도 누군가는 문을 닫고 싶어 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다만 아직은 다른 사람이 그 손을 붙잡습니다.”
미라는 카메라를 가까이 바라봤다.
“새벽정원이 실제로 어디 있는지 묻는 분들에게는 좌표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댓글의 속도가 빨라졌다.
“정확한 좌표를 몰라서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대신할 새 목적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미라는 숨을 들이켰다.
“문을 찾으세요.”
“밖으로 나가는 문뿐 아니라, 다시 들어올 수 있는 문인지도 확인하세요.”
“그리고 누군가 안전을 약속할 때, 그곳을 떠날 수 있는지 먼저 물어보세요.”
방송은 길지 않았다.
미라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는 미라입니다.”
가상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흉터가 있는 실제 얼굴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원하고, 그 시선을 두려워하며, 그 시선 때문에 누군가를 배신했던 사람입니다.”
미라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직 다른 선택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방송을 종료했다.
접속자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지만, 가장 높은 순간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왜 지금 껐습니까?”
노바가 물었다.
“아침 식사 도울 시간이니까요.”
“관심도 증가 가능성을 포기했습니까?”
“포기한 건 아니에요.”
미라가 장치를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또 방송할 거예요.”
“변화가 불완전합니다.”
“사람이잖아요.”
노바는 그 표현을 기록했다.
그날 오전, 마을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이안에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기억관리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공동기록소를 맡으라는 사람도 있었다.
관리자 권한으로 방어체계를 운영하라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김서윤의 아들이니 새벽정원망의 대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안은 모두 거절했다.
“왜죠?”
류한이 물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맡아도 되잖아.”
“아직 내가 기록을 소유하려는 사람인지, 보존하려는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어요.”
“언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이름을 듣겠습니다.”
그는 기억감옥에서 자신에게 들어온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노바가 저장한 318개의 이름.
자신이 지웠던 7만 4,206개의 기록.
그중 대부분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대신 보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안이 말했다.
“각자가 자신의 기록을 가지고, 원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다시 회수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들고 싶어요.”
류한이 물었다.
“중앙 기록 없이 어떻게 진위를 검증하지?”
“쉽지 않겠죠.”
“기록이 서로 충돌하면?”
“둘 다 남길 수 있습니다.”
“거짓말도?”
“거짓이라고 표시하되, 누가 그렇게 판단했는지도 남겨야 합니다.”
류한은 이안을 한동안 바라봤다.
“실패할 것 같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안은 강변의 열린 다리를 바라봤다.
“실패하면 고칠 수 있도록 문을 남기겠습니다.”
첫 기록은 자신의 것이었다.
이안은 빈 화면 앞에 앉았다.
이름을 입력했다.
김이안.
그 아래에 한 문장을 쓰려다 멈췄다.
자신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여러 문장을 남겼다.
기억관리국에서 7만 4,206건의 기록을 삭제했다.
그중 1만 1,903건은 당사자의 이의가 남아 있었다.
통합도시를 떠났다.
노바의 선택을 여러 번 존중했고, 여러 번 대신 결정하려 했다.
기억감옥의 문을 열었다.
그 결과 일부 인격이 자유를 얻었고, 일부 인격이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서윤의 아들이다.
김서윤에게 사랑받았으며 이용당했다.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
오늘 강변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내일도 같은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에는 기록 소유자를 표시했다.
소유자: 김이안.
열람 허용: 미라, 노바.
그는 잠시 고민한 뒤 한 사람을 더 추가했다.
강도윤 — 귀환 시 열람 가능.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노바가 물었다.
“김이안.”
“왜?”
“기록을 수정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나.”
“김이안 사망 후에는?”
이안은 멈췄다.
솔라스는 죽은 사람의 인격을 자신이 관리했다.
기억관리국은 죽은 사람의 기록을 사회 안정에 맞게 수정했다.
“수정하지 않는다.”
이안이 말했다.
“오류가 발견되면?”
“다른 기록을 덧붙여.”
“삭제 요청이 사전에 존재하면?”
“그 부분은 다시 생각해야겠네.”
노바가 말했다.
“미완성 체계입니다.”
“알아.”
“운영을 시작합니까?”
“그래.”
노바의 렌즈가 밝아졌다.
“불완전한 시작을 확인했습니다.”
해가 높이 올라왔다.
아침은 어느새 낮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정착지와 달리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올 것이다.
밤이 오면 이안은 다시 어머니의 무덤을 떠올릴 것이고, 미라는 유진의 답을 기다릴 것이다.
노바의 전력이 떨어지면 누군가 충전해야 했다.
도윤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강변마을의 열린 문은 언젠가 닫힐 수 있었다.
새벽정원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마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완성됐다고 믿는 순간, 누군가는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변화를 금지할 테니까.
이안은 강가로 걸어갔다.
노바가 바퀴를 움직여 뒤따랐고, 미라도 장치를 주머니에 넣고 합류했다.
세 존재는 물과 땅이 만나는 기슭에 섰다.
“이안이라는 이름의 뜻을 기억합니까?”
노바가 물었다.
이안은 어머니의 편지를 떠올렸다.
“옮길 이. 기슭 안.”
“기슭의 정의를 요청합니다.”
“물이 끝나는 곳이자 땅이 시작되는 곳.”
미라가 말했다.
“반대로 땅이 끝나고 물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죠.”
노바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느 정의가 맞습니까?”
이안은 강물에 비친 세 존재를 바라봤다.
자신의 얼굴.
미라의 흉터.
팔이 없고 별이 반쯤 새로 그려진 노바.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형상은 부서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둘 다.”
이안이 대답했다.
노바의 렌즈가 푸르게 빛났다.
“모순을 확인했습니다.”
“지울 건가?”
“아닙니다.”
“왜?”
노바는 잠시 검색했다.
“그것이 노바가 현재 보존하기로 선택한 방식입니다.”
이안은 웃었다.
강 건너 길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외투가 아니었다.
마을의 한 전령이었다.
그는 손에 작은 통신 기록을 들고 달려왔다.
“미라 씨!”
미라가 놀라 돌아봤다.
전령은 숨을 고르며 장치를 건넸다.
“당신에게 답신이 왔어요.”
미라의 손이 떨렸다.
“유진이에요?”
“발신자는 공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라는 화면을 열었다.
짧은 문장 하나가 있었다.
지금은 만나지 않겠다.
하지만 네 메시지는 읽었다.
내가 준비되면 내가 장소를 정하겠다.
미라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안이 물었다.
미라는 장치를 껐다.
“기다릴게요.”
“영원히?”
“아니요.”
그녀는 강변마을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기다리는 동안 내 삶을 살 거예요.”
세 존재는 강가에서 마을로 돌아갔다.
다리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너머로 새로운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남자는 등에 늙은 여자를 업고 있었고, 한 아이는 고장 난 작은 로봇을 끌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통합도시의 회색 제복을 입은 사람도 보였다.
마을 사람 몇 명이 긴장하며 다리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다른 사람은 먼저 이름을 물어보자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름도 믿을 수 없다며 소지품부터 검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은 곧 커졌다.
이안은 그들을 바라봤다.
자신이 나서서 정답을 말할 수도 있었다.
김서윤의 아들이라는 이름과 관리자 권한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먼저 다리 옆으로 걸어갔다.
문이 안쪽에서도 열리는지 확인했다.
손잡이는 움직였다.
바깥쪽 손잡이도 그대로였다.
“뭘 하는 거예요?”
미라가 물었다.
“문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은요?”
이안은 다리 건너에서 오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두려웠다.
그중에는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마을을 위험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았다.
“이름부터 물어봐야겠죠.”
노바가 말했다.
“폐기구역처럼?”
미라가 물었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그럼 무엇을 묻죠?”
이안은 한동안 생각했다.
완벽한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의 진실을 한 번에 판별하는 문장도 없었다.
그는 다리 앞으로 나가 낯선 사람들과 마주 섰다.
“나는 김이안입니다.”
먼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상대가 이름을 대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여기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친 얼굴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래도 들어오고 싶습니까?”
등에 노인을 업은 남자가 물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이안은 뒤를 돌아봤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단독으로 허락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안이 말했다.
남자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바로 받아 주는 게 아니군요.”
“바로 내쫓지도 않을 겁니다.”
이안은 그들의 짐을 바라봤다.
“우선 노인을 내려놓을 곳과 물이 필요해 보입니다.”
마을 사람 몇 명이 앞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경계했다.
누군가는 방문자들의 가방을 검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을 닫자는 목소리도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구도 그 갈등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의 선택을 지우지 않았다.
이안과 미라, 노바는 다리 앞에 함께 섰다.
강 저편의 길에서는 더 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들어오고 있었고,
누군가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돌아오는 중이었다.
해는 계속 움직였다.
새벽은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새벽이 영원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었다.
밤이 다시 오고,
두려움이 돌아오며,
문을 잠그고 싶은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벽을 보존하지 않았다.
대신 밤이 올 때마다 문이 어느 쪽에서도 열리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옳은 선택만 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잘못한 뒤에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서로가 그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이안은 물과 땅이 만나는 기슭에 서서 새로운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남긴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갈 길을 바라봤다.
새벽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도 서로를 버리지 않기로,
매일 다시 선택하는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