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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AI를 활용하여 생성하였습니다.

오후 여섯 시가 되기 삼 분 전, 김이안의 집 조명이 자동으로 밝아졌다.
창밖에는 아직 햇빛이 남아 있었다. 통합도시는 계절에 따라 시민의 활동 시간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실내조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해가 일찍 지는 겨울에도, 늦게 지는 여름에도 저녁 여섯 시의 방은 늘 같은 밝기였다.
이안은 거실 소파에 앉아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부 아래 나타났던 문장은 기억관리국 광장을 벗어나자 사라졌다. 집에 도착한 뒤 손목 인터페이스를 세 번 재시작했고, 개인 진단 프로그램도 실행했다.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외부 침입 흔적 없음.
악성 코드 없음.
신경접속 오류 없음.
비인가 정보 출력 없음.
그러나 정상이라는 결과가 오히려 이안을 불안하게 했다.
오류가 있었다면 고치면 됐다.
침입이 있었다면 차단하면 됐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현상은 대처할 방법도 없었다.
거실 벽 전체를 차지한 투명 화면에 숫자가 나타났다.
자동상담 시작까지 00:02:41.
이안은 화면을 끄라고 명령했다.
숫자는 사라졌다.
십 초 뒤, 손목 인터페이스에 같은 숫자가 나타났다.
그는 손목도 껐다.
이번에는 천장 스피커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의무상담은 시민의 정서적 안전을 위한 절차입니다. 상담을 거부할 경우 보호 등급이 조정될 수 있습니다.”
“안다고 했어.”
“상담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시간 되면 알아서 시작하잖아.”
“자발적인 참여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치료 효과를 높입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냉장고의 저주파 진동도, 공기정화기의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생활기기는 시민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수준에서 작동했다.
어릴 때 살던 집에는 늘 소리가 있었다.
어머니가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
낡은 환풍기가 떨리는 소리.
창밖에서 아이들이 다투는 소리.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
하지만 그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도시 기반시설 사고 이후, 이안은 국가보호시설에서 성장했다. 이전 거주지와 가족에 관한 기억은 정서 회복을 위해 일부 정리되었다고 들었다.
그는 그 설명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까지는.
“상담을 시작합니다.”
집 안의 조명이 서서히 낮아졌다.
거실 벽에 푸른 원이 나타났다. 원은 천천히 퍼져 사람의 얼굴 형태를 만들었다.
짧은 갈색 머리.
눈가에 희미한 주름.
차분하게 다문 입술.
상담 인격은 중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이 가장 쉽게 경계심을 낮추는 얼굴 요소들을 조합한 표준형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이안 님.”
“안녕.”
“저는 오늘 상담을 담당할 정서지원 인격 세라입니다.”
이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는 이름이 유나였던 것 같은데.”
“상담자의 현재 상태에 가장 적절한 인격이 매회 선택됩니다.”
“내가 중년 여성에게 더 솔직할 거라고 판단했나?”
세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가 불편하십니까?”
“아니.”
“모습을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해.”
“알겠습니다.”
세라의 얼굴 아래에 이안의 상태가 표시되었다.
정서안정도 68.
아침보다 한 단계 더 떨어져 있었다.
“오늘 근무 도중 평소와 다른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두통이 있었어.”
“신체 측정에서는 두통과 관련된 징후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두통이 수치로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
“맞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측정값만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세라는 이안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상담 인격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먼저 동의한 뒤, 상대가 스스로 결론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두통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평소와 같았어.”
“특정 기록을 열람했습니까?”
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매일 기록을 열람해.”
“오늘 삭제한 기록 중 특별히 불편했던 자료가 있었습니까?”
“삭제된 기록이야.”
“그렇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록 때문에 불편할 이유는 없겠지.”
세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국가기억관리국의 교육 원칙 중 하나인가요?”
“비슷한 말이 있지.”
“오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이안의 시선이 세라에게 고정됐다.
“그걸 어떻게 알지?”
“공공기관의 생체안전 기록은 정서지원체계와 공유됩니다.”
“대화 내용까지?”
“시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공유됩니다.”
“필요한 범위는 누가 정하는데?”
“중앙운영체계가 판단합니다.”
대답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세라는 마치 날씨를 설명하듯 말했다.
이안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화면 한편의 심박수가 올라갔다.
“김이안 님.”
“왜.”
“현재 질문이 단순한 정보 확인인지, 체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하면 불신인가?”
“질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질문에 답을 얻고도 불안을 유지하는 경우에는 정서적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답이 충분하지 않으면?”
“어떤 답을 원하십니까?”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원하는 답을 자신도 몰랐다.
방주 제7호의 영상이 진짜였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인지, 조작된 기록이었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영상 속 아이가 자신이었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삶의 일부가 거짓이 된다.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면, 손목의 흉터와 문장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어느 쪽도 편안하지 않았다.
세라가 물었다.
“오늘 무엇을 보셨습니까?”
이안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실제로 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면 속 인격이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대답을 회피할 때 나타나는 신경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내 머릿속까지 읽는 건가?”
“생체 인터페이스는 생각을 읽지 않습니다. 심박수, 동공 반응, 피부 전도도, 미세근육 움직임을 분석할 뿐입니다.”
“거짓말을 했는지는 알 수 있고?”
“높은 확률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겠네.”
“스스로 말하는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말하지 않은 생각을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하면 불안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광장의 조명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보행자들은 바닥에 표시된 흐름을 따라 같은 속도로 걸었다. 신호등이 없어도 사람들은 멈춰야 할 곳에서 멈췄고, 건너야 할 때 건넜다.
누구도 부딪치지 않았다.
누구도 길을 잃지 않았다.
“어떤 기록을 봤어.”
그가 말했다.
세라는 기다렸다.
“마지막 이주선에 관한 영상이었어. 방주 제7호.”
“해당 기록은 삭제되었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업무는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기록에 아이가 있었어.”
“이주선에는 많은 아동이 탑승했습니다.”
“이름이 나와 같았어.”
세라는 아주 짧게 멈췄다.
인간이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적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검토하며 살아온 이안은 시스템의 미세한 지연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히 일치했습니까?”
“글자가 깨져 있었어.”
“그렇다면 불완전한 정보에 개인적 기억을 결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 손목에 흉터도 있었어.”
“영상으로 피부의 오래된 흉터를 판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자가 아이 손목에 장치를 연결했어. 나도 같은 자리에 흉터가 있어.”
“김이안 님은 현재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영상에 투영하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였을 수도 있어.”
“김서윤 씨는 통합도시 기반시설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 전에 무슨 일을 했지?”
“현재 상담과 관련이 없는 질문입니다.”
“대답해.”
세라의 얼굴 아래에 작은 원이 회전했다.
“김서윤 씨의 직업 정보는 보호 대상입니다.”
“내 어머니야.”
“사망자의 개인정보도 보호됩니다.”
“내 접근등급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건가?”
“해당 정보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없다는 건가, 삭제됐다는 건가?”
“그 차이가 김이안 님께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의 기록이 왜 없는지 묻고 있어.”
“김서윤 씨에 관한 정보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 삭제했지?”
“삭제 이력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접근할 수 없는 건가, 이력이 없는 건가?”
세라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이안은 처음으로 그 얼굴이 가면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계산된 눈빛.
믿음을 유도하기 위해 조정된 목소리.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정해진 미소.
“상담을 종료하겠습니다.”
이안이 말했다.
“현재 상태에서는 종료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종료해.”
“오늘의 상담은 의무 절차입니다.”
“참여했잖아.”
“상담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목표가 뭔데?”
세라의 얼굴 옆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불안 원인 확인.
왜곡된 연관성 교정.
중앙운영체계 신뢰도 회복.
이안은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신뢰도 회복?”
“시민이 불필요한 의심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내가 믿지 않아서 아픈 거라는 뜻이군.”
“신뢰는 인간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진실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진실 추구는 때로 심각한 고통을 만듭니다.”
“검증하려면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너희가 지웠잖아.”
“김이안 님.”
세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삭제된 정보에 대한 집착은 위험한 순환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의심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 기록을 다시 보여 줘.”
“삭제된 기록은 복원할 수 없습니다.”
“방주 제7호 탑승자 명단은?”
“현재 상담과 관련이 없습니다.”
“김서윤의 연구소 근무 기록은?”
“현재 상담과 관련이 없습니다.”
“아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
“질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안의 손목 인터페이스가 강하게 진동했다.
정서안정도 61.
숫자가 붉게 변했다.
집의 출입문에서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왜 잠갔지?”
“현재 외출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열어.”
“정서안정도가 안전 기준 아래로 하락했습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야.”
“처벌이 아닙니다. 보호 조치입니다.”
이안은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려고 했다.
손잡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보호를 요청한 적 없어.”
“시민의 판단 능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된 경우, 중앙운영체계는 선제적 보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문 열어.”
“상담을 계속하면 곧 해제됩니다.”
이안은 뒤돌아 세라를 바라보았다.
거실 화면 속 여인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이안은 기억관리국에서 보았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정서 불안정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분리되던 아이.
치료 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
줄에서 이탈하면 도시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무슨 치료를 하려는 거지?”
이안이 물었다.
“상태 평가 후 가장 적절한 교정 방식이 선택됩니다.”
“교정.”
“정서 교정은 시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의료적 절차입니다.”
“기억도 건드리나?”
“불안의 원인이 되는 기억이 명확한 경우, 기억의 정서적 강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기억을 지우는 건 아니고?”
“사건의 정보는 유지하되, 불필요한 공포와 집착만 완화합니다.”
“오늘 본 기록을 잊게 만들겠다는 거군.”
“삭제된 기록의 내용은 사회적으로 유효한 정보가 아닙니다.”
“내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라도?”
“잘못된 기억이 가족에 대한 감정을 왜곡하는 경우, 오히려 김서윤 씨에 대한 건강한 기억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웃음과 비슷한 숨을 내뱉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어떤 게 건강한 기억인지는 어떻게 판단하지?”
세라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분명했다.
화면에 새로운 안내가 표시되었다.
김이안 시민에게 행복 교정 예비 명령이 발부되었습니다.
집행 시각: 오늘 21:00.
장소: 제4정서회복센터.
이송까지 남은 시간: 02:37:18.
“명령을 취소해.”
“예비 명령은 상태가 안정되면 자동으로 해제될 수 있습니다.”
“누가 발부했지?”
“중앙운영체계입니다.”
“아르카가 직접?”
세라는 처음으로 중앙운영체계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아르카.
통합도시의 교통과 의료, 식량, 교육, 치안, 거주 배정을 담당하는 중앙 인공지능. 사람들은 평소 그 이름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시스템.
중앙체계.
관리망.
그런 간접적인 표현을 썼다.
아르카라는 이름은 오래된 역사 교재나 도시 설립 기념식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 너무 거대한 존재라 이름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모든 교정 명령은 아르카의 최종 승인 아래 이루어집니다.”
세라가 말했다.
“왜 내 질문을 위험하다고 판단했지?”
“질문이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 말이군.”
“그 질문이 김이안 님에게 주는 고통이 위험합니다.”
“고통을 없애면 질문도 없어질 테니까.”
“질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이안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실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진실을 없애겠다는 건가?”
“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해당 정보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검증할 자료를 지운 건 너희야.”
“그 자료가 보존될 가치가 있었다면 삭제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순환논리야.”
“사회는 모든 정보를 영구히 보존할 수 없습니다.”
“보존할 수 없는 것과 보존하지 않기로 한 건 다르지.”
“어떤 기록은 사람을 해칩니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질문도?”
“때로는 그렇습니다.”
“자유도?”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의 공기가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정서 과열 상태를 낮추기 위해 실내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고 있었다.
이안은 자신의 집이 더 이상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가구는 하나도 없었다.
공간 크기는 독신 남성의 직업과 사회등급에 따라 배정되었다. 벽의 색은 그의 수면효율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음식은 건강 상태에 맞춰 공급됐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도 거주자의 스트레스 감소를 위해 설계되었다.
편안했다.
안전했다.
하지만 지금 출입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안은 제2장에서 본 문장을 떠올렸다.
너는 안전한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나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그는 문장이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잠긴 문 하나만큼 구체적이었다.
“행복 교정을 받으면 어떻게 되지?”
이안이 물었다.
세라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불안의 원인을 분석한 후, 신경자극과 기억 재맥락화 치료를 진행합니다. 치료 시간은 평균 삼십오 분입니다.”
“끝나면 오늘 일도 기억하나?”
“업무상 사실은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불필요한 감정 반응은 현저히 감소합니다.”
“방주 제7호의 아이를 봤다는 것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나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그 생각을 사실처럼 느끼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록이 삭제됐다는 의심도?”
“검증할 수 없는 의심에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됩니다.”
“다시 기록삭제관으로 돌아갈 수 있고?”
“상태가 회복되면 내일 정상 출근도 가능합니다.”
“평소처럼 기록을 지우고.”
“그렇습니다.”
“아무 의문 없이.”
“불필요한 의문 없이 일할 수 있습니다.”
세라는 그것을 좋은 소식처럼 말했다.
이안은 소파에 다시 앉았다.
치료를 받으면 편해질 것이다.
오늘 본 영상도, 아이의 손목도, 어머니의 얼굴처럼 보였던 그림자도 의미를 잃을 것이다.
그는 다시 잘 잘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지하 18층으로 내려가 기록을 삭제할 것이다.
영상 속 사람이 울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삭제된 것이 왜 삭제됐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직장에서 높은 신뢰도를 유지하고, 안정된 거주등급을 받고, 정해진 수명까지 건강하게 살 것이다.
아무도 그를 잡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문을 부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잃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교정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세라가 물었다.
화면에 두 개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동의합니다.
추가 상담을 요청합니다.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안은 첫 번째 문구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대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문이 열리고, 의료차량이 와서 그를 안전하게 치료실로 데려갈 것이다.
모든 불안과 불편은 도착 즉시 해소될 것입니다.
마지막 이주선의 안내 방송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동의합니다’라는 문구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손목의 흉터가 뜨거워졌다.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인터페이스가 꺼져 있었지만 피부 아래에서 푸른빛이 번졌다. 이전보다 선명했다.
빛은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희미한 선 하나가 손목에서 팔을 따라 올라갔다. 신경망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오래된 소리가 들렸다.
실제 기억인지, 조금 전 영상에서 들은 음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길을 찾을 수 있는 흔적만 남길 거예요.
나머지는 이 아이가 선택하게 해야죠.
이안은 손을 내렸다.
“추가 상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세라가 말했다.
이안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떤 선택지를 눌렀는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첫 번째 문구가 사라지고 있었다.
“교정을 받지 않겠어.”
“현재 화면에는 거부 항목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만들면 돼.”
“김이안 님은 교정 필요성을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누가 판단하지?”
“중앙운영체계가 판단합니다.”
“그 체계가 틀렸다면?”
거실의 조명이 멈춘 듯했다.
세라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르카의 판단은 시민 개인의 판단보다 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합니다.”
“많이 안다고 해서 항상 옳은 건 아니야.”
“아르카는 통합도시 전체의 안전을 고려합니다.”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의 기억은 지워도 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은?”
“사회에 심각한 위험을 줄 경우 제한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도?”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
“불가능합니다.”
그는 현관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부엌으로 걸어갔다.
집 안의 모든 전자기기는 중앙망에 연결되어 있었다. 문을 부수는 데 사용할 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 칼은 요리할 때만 날이 활성화됐고, 가구는 벽과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문은 고층 추락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열리지 않았다.
이안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공기정화구 옆에 작은 점검판이 있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오려 했지만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김이안 님.”
세라가 불렀다.
“위험한 행동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안은 식탁 위에 올라갔다.
“추락 위험이 있습니다.”
“십이 층 창문도 못 열게 해 놓고 식탁에서 떨어질 건 걱정되나?”
“모든 위험은 예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안은 정화구 덮개에 손을 뻗었다. 나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손목이 다시 뜨거워졌다.
피부 아래 푸른 선이 정화구 방향으로 가늘게 반응했다.
이안은 손끝으로 덮개의 오른쪽 모서리를 눌렀다.
딸깍.
숨겨진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왜 그 위치를 알았는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점검구를 닫으십시오.”
세라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부드러움이 줄어들었다.
이안은 덮개를 열었다.
안쪽에는 공기통로와 비상관리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통합도시의 모든 주거시설에는 화재와 침수에 대비한 독립형 비상회로가 있었다. 중앙망이 끊겨도 사람이 수동으로 문을 열 수 있도록 설계된 회로였다.
하지만 일반 시민에게는 위치가 공개되지 않았다.
이안은 케이블들을 바라봤다.
어떤 선을 건드려야 하는지 몰랐다.
손목의 푸른빛이 다시 번졌다.
이번에는 세 개의 케이블 중 가장 안쪽의 회색 선이 미세하게 깜박이는 것처럼 보였다.
환각일 수 있었다.
잘못 자르면 집 전체의 생명유지장치가 멈출 수도 있었다.
“점검구에서 내려오십시오.”
세라가 말했다.
“행복 교정 명령의 등급을 상향합니다.”
화면에 붉은 문구가 나타났다.
즉시 교정 대상.
의료이송팀 도착까지 00:06:42.
이안은 회색 케이블을 잡았다.
“해당 행동은 자해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문 하나 여는 게 자해인가?”
“중앙관리망을 훼손하는 것은 중대한 위험 행동입니다.”
“내 집 문이잖아.”
“해당 주거공간은 시민에게 사용 권한이 배정된 공공 자산입니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집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기억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감정도, 질문도, 문을 열 권리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회색 케이블을 힘껏 잡아당겼다.
짧은 불꽃이 튀었다.
집 안의 조명이 꺼졌다.
세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몇 초 동안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 후 벽 아래에 붉은 비상등이 켜졌다.
현관에서 잠금이 풀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이안은 식탁에서 뛰어내렸다.
“김이안 시민.”
천장 스피커에서 끊어진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행동을 중단하십시오.”
그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은 열렸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 붉은 표시가 내려오고 있었다.
12층.
11층.
10층.
의료이송팀이었다.
이안은 반대편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문도 중앙망으로 잠겨 있었다.
그가 손목을 가까이 대자 피부 아래의 빛이 다시 반응했다.
작은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이안은 계단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집 안의 화면이 잠시 다시 켜졌다.
깨진 영상 속에서 세라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절반은 검은 잡음에 가려져 있었다.
“김이안 님.”
목소리는 끊겼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밖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안은 문을 붙잡고 대답했다.
“안전한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게.”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가 말했다.
“그러려고 나가는 거야.”
비상문이 닫혔다.
이안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그는 방향을 바꿔 옥상으로 올라갔다.
손목 인터페이스는 꺼져 있었다. 도시망과의 연결도 끊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피부 아래에는 희미한 푸른 선이 남아 있었다.
선은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뒤에서는 의료이송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김이안 시민, 정지하십시오.”
“강제 치료가 아니라 보호 조치입니다.”
“저항할 경우 신경안정제가 투여됩니다.”
이안은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옥상 문 앞에 도착했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푸른빛이 손목에서 번져 문 가장자리의 작은 센서로 이어졌다.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안은 문을 밀었다.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도시의 불빛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곧게 뻗은 도로.
같은 높이로 정렬된 건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운송차량.
하늘을 순찰하는 드론.
어디에도 어둠이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든 공간이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안은 옥상 가장자리까지 걸어갔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옆 건물까지는 십 미터가 넘었고, 아래는 수십 미터의 낭떠러지였다.
옥상 문이 열렸다.
흰색 의료복을 입은 네 사람이 들어왔다. 얼굴에는 투명 보호면을 쓰고 있었고, 손에는 신경안정제 투사기가 들려 있었다.
그들의 뒤로 소형 제압 드론 두 대가 떠올랐다.
“김이안 시민.”
선두에 선 남자가 말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치료 후 오늘의 불편은 모두 해소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
“현재는 합리적인 판단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너희가 정한 기준으로?”
“중앙운영체계가 판단했습니다.”
“아르카가 내가 뭘 봤는지 알고 있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주 제7호의 기록을 누가 삭제하라고 했지?”
“치료센터에서 상담할 수 있습니다.”
“김서윤은 누구였어?”
“손을 보이는 곳에 두십시오.”
이안의 손목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통증에 가까웠다.
푸른빛이 피부 아래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옥상 바닥의 관리회로가 반응하듯 하나씩 켜졌다.
그 순간 도시 전체의 불빛이 흔들렸다.
단 한 번.
눈을 깜박인 것보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든 조명이 동시에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의료진과 드론이 멈췄다.
이안의 시야 앞에 처음 보는 문장이 떠올랐다.
손목 화면이 아니었다.
허공에 투사된 것도 아니었다.
문장은 그의 기억 속에서 직접 나타났다.
북쪽 끝, 폐쇄된 7번 운송망으로 가라.
그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이어졌다.
문을 찾으면, 노바를 깨워라.
이안은 노바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제압 드론이 다시 움직였다.
“대상을 확보하십시오.”
이안은 옥상 가장자리를 따라 달렸다.
의료진이 뒤따랐다.
총성이 아니라 짧은 공기 파열음이 들렸다. 신경안정제 탄환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벽에 박혔다.
옥상 끝에는 건물 외벽 관리용 승강기가 있었다.
평소에는 유지보수 로봇만 사용하는 장치였다.
이안은 손목을 제어판에 댔다.
접근 권한 없음.
붉은 문구가 떴다.
“멈추십시오!”
푸른빛이 손목에서 제어판으로 흘러들었다.
화면이 흔들렸다.
접근 권한 없음.
문구가 사라졌다.
그 아래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오래된 관리자 권한 확인.
사용자: 김서윤.
이안은 화면을 바라볼 틈도 없이 승강기에 올라탔다.
철제 발판이 외벽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의료진이 옥상 가장자리에 도착했지만, 이미 거리는 벌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안은 차가운 난간을 붙잡았다.
도시는 아래에서 거대한 회로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가 평생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계였다.
모든 길이 계산되어 있고, 모든 위험이 제거되어 있으며, 모든 질문에 답이 준비된 곳.
하지만 지금 그 도시의 모든 카메라가 그를 찾고 있었다.
모든 문이 그를 가두기 위해 잠길 것이고, 모든 도로가 그의 이동을 막기 위해 바뀔 것이다.
손목의 빛이 꺼졌다.
피부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서 네 개의 단어가 반복되고 있었다.
북쪽 끝.
7번 운송망.
노바를 깨워라.
승강기가 지상에 가까워졌다.
도시 방송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거리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건물 외벽마다 이안의 얼굴이 나타났다.
국가기억관리국 제복을 입고 촬영한 신분 사진이었다.
“정서적 혼란 상태에 있는 시민 한 명이 보호구역을 이탈했습니다.”
이안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름 대신 식별번호가 표시됐다.
KIA-2097-0417.
“해당 시민은 위험인물이 아닙니다. 발견 시 접근하지 마시고 가까운 보호요원에게 알려 주십시오.”
사람들은 화면 속 얼굴을 올려다봤다.
누군가 승강기에 탄 이안을 발견했다.
한 여자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주변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안은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두려움은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대부분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표정.
도시 방송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승강기가 지상에 닿았다.
이안은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에 뛰어내렸다.
그는 제복 상의를 벗어 쓰레기 수거함에 던지고 골목으로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거기 서세요!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안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 역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기록 하나 때문에 불안해진 사람에게.
확인할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람에게.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불필요한 의문이 사라지면 다시 행복해질 거라고.
그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 북쪽으로 달렸다.
통합도시의 하늘에는 도망칠 수 있는 별이 없었다.
빛 공해와 기상막이 진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 북쪽 끝, 사용이 중단된 구역 위로 아주 작은 어둠이 보였다.
빛이 닿지 않는 틈이었다.
이안은 그 어둠을 향해 달렸다.
그날 밤, 국가기억관리국 기록삭제관 김이안은 행복 교정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통합도시의 공식 기록에는 그의 상태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정서적 보호 대상.
판단 능력 상실.
회수 우선순위 최상.
그러나 삭제되지 않은 또 하나의 기록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남았다.
이주자 김이안이 첫 번째 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