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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도시의 북쪽에는 길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도에 표시되는 길이 없었다.
시민용 운송망은 북부 제5생활권에서 끝났다. 그 너머에는 오래된 물류창고와 폐쇄된 발전시설, 도시 건설 초기에 사용되었던 지하 운송터널이 남아 있었다. 공식 안내지도에서는 그 일대가 흐린 회색으로 표시되었다.
도시 기반시설 보호구역.
민간인 출입 금지.
시민들은 그곳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통합도시에서 필요한 모든 시설은 생활권 안에 있었다. 직장과 주거지, 의료센터, 공원, 오락시설은 개인별 이동권 안에서 배정됐다. 허가된 경로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고, 이유가 없는 이동은 곧 위험을 뜻했다.
김이안은 태어나서 한 번도 북부 제5생활권 너머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발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경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도시가 선택해 주는 길을 따르지 않기로 했을 뿐이었다.
거리의 대형 화면마다 이안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어떤 화면에서는 국가기억관리국 제복을 입고 있었고, 어떤 화면에서는 조금 전 아파트 옥상에서 촬영된 모습이 재생됐다. 숨을 몰아쉬며 외벽 승강기에 올라타는 장면이었다.
화면 아래에는 붉은 글씨가 반복해서 흘렀다.
정서적 보호 대상.
접근 금지.
발견 시 즉시 신고하십시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안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길에 사람이 줄었고, 지나가는 시민 하나하나가 그를 오래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안은 골목 끝에 놓인 무인 의류수거함을 발견했다. 잠금장치가 있었지만 손목을 가까이 대자 이상할 만큼 쉽게 열렸다.
안에는 세탁을 기다리는 작업복 몇 벌이 들어 있었다.
그는 회색 관리복과 낡은 방수 외투를 꺼냈다. 기억관리국 제복을 벗어 수거함 깊숙이 밀어 넣은 뒤 관리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통합도시의 모든 공공 카메라는 시민의 얼굴뿐 아니라 걸음걸이, 체형, 체온, 심장박동까지 식별했다. 옷을 바꾸는 것으로는 오래 숨을 수 없었다.
이안은 손목 인터페이스를 내려다봤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장치 자체는 피부 아래에 이식되어 있었다. 필요하다면 중앙체계가 강제로 다시 연결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근처 공공세면대에서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알던 김이안이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출근하고, 정해진 업무량을 처리하며, 특별한 문제 없이 살아온 남자.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얼굴이 도시 전체에 수배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합리적인 판단이 어려운 상태.”
이안은 화면에서 보았던 문장을 중얼거렸다.
자신을 체포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보호와 체포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없었다.
이안은 세면대 아래의 비상보관함을 열었다. 소독제, 붕대, 체온 유지포가 들어 있었다. 그는 필요한 물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을 빼려는 순간, 보관함 안쪽에서 작은 금속 조각이 떨어졌다.
낡은 수동식 절단기였다.
통합도시의 물건답지 않았다. 날이 직접 드러나 있었고, 안전잠금장치도 없었다. 도시 건설 초기에 사용된 장비인 듯했다.
이안은 절단기를 들어 손목 가까이 가져갔다.
인터페이스를 제거할 수 있을까.
피부를 절개하고 장치를 뜯어내면 추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체 인터페이스는 신경과 혈관에 연결되어 있었다. 전문 장비 없이 제거하면 손을 잃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절단기의 차가운 날이 흉터 위에 닿았다.
그 순간 피부 아래에서 푸른빛이 번졌다.
이안은 놀라 손을 뗐다.
빛은 짧은 선을 만들었다.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북쪽 끝, 폐쇄된 7번 운송망으로 가라.
문을 찾으면, 노바를 깨워라.
머릿속에 나타났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노바.
사람의 이름인지, 장비의 이름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 김서윤이 남긴 흔적이라면 믿어야 할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중앙체계가 만든 유인책일까.
아르카는 그가 어떤 기록을 보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손목의 장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북쪽으로 가라는 명령조차 그를 한적한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함정일 수 있었다.
이안은 절단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선택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길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도로 위로 순찰 드론 세 대가 지나갔다.
이안은 몸을 숙여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도시 중심부의 건물은 밝고 매끄러웠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외벽의 색이 어두워졌다. 광고 화면과 안내표시도 줄었다. 오래된 건물에는 교체되지 않은 금속 배관과 수동식 문이 남아 있었다.
도시는 바깥쪽부터 늙고 있었다.
그 사실은 통합도시의 홍보 영상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이안은 북부 제5생활권의 끝에 도착했다.
도로 중앙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었다.
장벽 너머로는 불이 꺼진 물류시설과 녹슨 철탑이 보였다. 도로는 계속 이어져 있었지만, 시민용 안내선은 장벽 앞에서 둥글게 방향을 틀어 다시 생활권 안으로 돌아왔다.
장벽에는 경고문이 떠 있었다.
이곳부터 기반시설 보호구역입니다.
허가 없이 진입할 경우 신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통합도시는 시민에게 ‘처벌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안은 장벽을 따라 걸었다.
통과문은 보이지 않았다.
몇 미터 간격으로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카메라 대부분이 꺼져 있다는 것이었다. 렌즈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일부는 비를 맞아 녹슬어 있었다.
관리에서 제외된 구역이었다.
이안은 장벽 끝에서 좁은 배수로를 발견했다.
철망으로 막혀 있었지만 자물쇠는 오래되어 부식돼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절단기를 꺼냈다. 두 번, 세 번 힘을 주자 철망 한쪽이 갈라졌다.
몸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틈이 생겼다.
그가 배수로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이안 시민.”
이안은 몸을 굳혔다.
도로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벽에 설치된 비상 안내기가 켜져 있었다.
오래된 장치라 화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스피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라였다.
“현재 위치에서 이동을 중단하십시오.”
“여기까지 따라왔나?”
“중앙운영체계는 모든 시민의 안전을 관리합니다.”
“내 손목은 꺼져 있어.”
“김이안 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생체 인터페이스만이 아닙니다.”
이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가로등.
도로 바닥.
건물 외벽.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감지장치일 수 있었다.
“의료이송팀이 오고 있습니다.”
세라가 말했다.
“치료를 받으면 오늘 겪은 혼란을 평온한 상태에서 다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바꾼 뒤에 판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기억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없애는 거라고 했지.”
“불필요한 고통을 완화합니다.”
“그 고통이 필요한 거라면?”
세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통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그래. 하지만 고통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도 있어.”
“현재 김이안 님은 위험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장벽을 넘는 게 그렇게 위험해?”
“장벽 너머는 관리되지 않은 구역입니다.”
“도시 밖은?”
“도시 밖에는 생존에 필요한 환경이 없습니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나?”
정적이 흘렀다.
이안은 그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대답해.”
“공식적으로 승인된 시민 거주지는 없습니다.”
“승인되지 않은 사람은 있다는 뜻이군.”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멀리서 낮은 엔진음이 들렸다.
도로 끝에서 흰색 의료차량이 나타났다.
이안은 배수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김이안 님.”
세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철망 틈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무릎이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혔다.
고통이 올라왔지만 일어섰다.
장벽 건너편에서 의료차량이 멈췄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내려 철망 쪽으로 달려왔다.
이안은 어둠 속으로 뛰었다.
몇 분 뒤, 장벽의 불빛도 보이지 않게 됐다.
주변은 믿기 어려울 만큼 캄캄했다.
통합도시 안에서는 완전한 어둠을 경험할 수 없었다. 밤에도 보행로와 건물, 운송망에서 빛이 나왔다. 수면 중에도 방 안에는 최소한의 안전등이 켜져 있었다.
이안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굴렀다.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오래된 냄새가 났다.
먼지와 녹, 고인 물과 기름이 섞인 냄새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거함에서 가져온 비상조명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희미한 빛이 켜졌다.
빛 속에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나타났다. 지붕 일부가 무너진 물류창고였다. 바닥에는 쓰러진 운송로봇과 부서진 컨테이너가 널려 있었다.
건물 벽면에는 오래된 숫자가 적혀 있었다.
7.
그 아래의 글자는 대부분 지워졌지만 일부는 읽을 수 있었다.
제7광역운송망 북부 정비기지.
이안은 숨을 고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 위로 작은 바퀴 자국들이 나 있었다.
아주 오래된 흔적은 아니었다.
누군가 이곳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안은 절단기를 손에 쥐었다.
무기로 쓰기에는 짧고 약했지만 빈손보다는 나았다.
정비기지 내부에는 수십 개의 작업대와 충전설비가 있었다. 대부분 전원이 끊겨 있었다. 천장에는 오래된 운송차량이 레일에 매달린 채 멈춰 있었다.
벽 한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비상대피시설 및 구형 지원기기 보관소.
이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손목의 흉터가 희미하게 빛났다.
문 옆에 잠금장치가 있었다.
그가 손목을 갖다 대자 화면이 켜졌다.
사용자 정보를 확인합니다.
짧은 잡음이 들렸다.
현재 사용자: 미등록.
보조 권한 검색 중.
잠시 뒤 화면의 글자가 바뀌었다.
관리자 권한 잔여 신호 확인.
등록 관리자: 김서윤.
이안은 화면을 바라봤다.
옥상 승강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권한이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의 손목 안에 남아 있었다.
“문 열어.”
이안이 말했다.
잠금장치가 녹슨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계단은 깊었다.
이안은 비상조명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넓은 지하 보관실이 있었다.
벽을 따라 캡슐형 보관함이 수십 개 놓여 있었다. 대부분 문이 열려 있었고 내부는 비어 있었다.
보관함 위에는 기기 종류가 표시되어 있었다.
의료보조형.
재난구호형.
아동돌봄형.
고령자지원형.
구형 로봇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이안은 보관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가장 끝에 단 하나의 캡슐만 닫혀 있었다.
표면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작은 상태등 하나가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아동·의료 통합돌봄 기체.
모델명 NV-04.
그 아래에는 손으로 긁어 새긴 듯한 글자가 보였다.
NOVA.
“노바.”
이안이 중얼거렸다.
머릿속의 문장과 같은 이름이었다.
캡슐 옆에 수동식 전원장치가 있었다.
화면을 누르자 경고문이 나타났다.
장기 보존 상태입니다.
기체의 인지모듈 손상 가능성 71퍼센트.
재가동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안은 잠시 망설였다.
이 로봇이 어머니와 연결돼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르카가 미리 준비한 장치일 수도 있었다.
폐기된 로봇 하나가 자신을 도울 가능성보다, 위치를 중앙체계에 알릴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는 화면 아래의 기록을 확인했다.
최종 관리자.
김서윤.
보관 명령.
중앙망에서 분리. 독립전원 유지. 지정 사용자의 접근 전까지 절대 가동 금지.
지정 사용자는 암호화되어 있었다.
이안은 손목을 인식기에 댔다.
잠시 뒤 암호가 풀렸다.
지정 사용자: 김이안.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머니는 이곳에 로봇을 숨겨 두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것이 삼십 년 전부터 계획된 일이라면, 어머니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안은 가동 버튼을 눌렀다.
보관실 전체의 조명이 한 번 깜박였다.
캡슐 안에서 낮은 기계음이 시작됐다.
독립전원 연결.
신경연산장치 검사.
기억영역 손상 확인.
운동기능 63퍼센트.
언어기능 81퍼센트.
중앙망 연결 없음.
기동을 시작합니다.
캡슐의 투명 덮개가 열렸다.
안에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로봇이 앉아 있었다.
몸체는 흰색이었지만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얼굴에는 입이나 코 대신 매끄러운 금속판이 있었고, 눈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검은색 렌즈 두 개가 달려 있었다.
가슴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그림이 붙어 있었다.
아이가 그린 듯한 파란 별이었다.
로봇의 손가락이 한 번 움직였다.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검은 렌즈 안에서 작은 푸른빛이 켜졌다.
“시스템…… 시작.”
목소리는 중성적이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오래된 스피커 때문에 끝부분이 갈라졌다.
“현재 시각 확인 실패.”
로봇이 고개를 돌렸다.
“중앙망 연결 실패.”
시선이 이안에게 멈췄다.
“사용자 식별을 요청합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봇의 눈에서 가느다란 빛이 나와 그의 얼굴을 훑었다.
“얼굴 정보 불일치.”
빛이 손목으로 이동했다.
“생체 암호 확인.”
짧은 정적.
“지정 보호 대상 확인.”
로봇의 눈빛이 밝아졌다.
“김이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안은 절단기를 더 세게 쥐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보호 명령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등록했어?”
“관리자 김서윤.”
“김서윤을 기억하나?”
로봇의 눈빛이 깜박였다.
“기억영역을 검색합니다.”
몇 초가 지났다.
“관리자 김서윤. 중앙체계연구소 소속. 생체 인터페이스 설계 담당. 노바의 최종 관리자.”
“그게 전부야?”
“추가 정보에 손상이 있습니다.”
“왜 나를 보호 대상으로 지정했지?”
“기억영역을 검색합니다.”
로봇의 머리 안에서 작은 진동음이 났다.
“검색 실패.”
“새벽정원이 뭔지 알아?”
노바의 눈빛이 갑자기 꺼졌다가 켜졌다.
“해당 단어는 제한 정보입니다.”
“알고 있다는 뜻이군.”
“접근 권한을 확인합니다.”
“나는 지정 사용자야.”
“지정 보호 대상과 제한 정보 접근 권한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삼십 년 전 로봇조차 자신에게 정보를 숨기고 있었다.
“중앙망에 연결돼 있나?”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르카에게 내 위치를 전송할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거짓말할 수 있나?”
노바는 잠시 멈췄다.
“돌봄 기체는 보호 대상의 안전을 위해 일부 정보를 제한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인간은 거짓말이라고 불러.”
“정의상 유사합니다.”
“그럼 네 말을 믿을 이유가 없군.”
“맞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내가 너를 깨우라는 지시를 받았어.”
“지시 주체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어. 내 손목에서 문장이 나타났어.”
“손목을 보여 주십시오.”
“싫어.”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노바가 캡슐에서 일어나려 했다.
관절에서 거친 마찰음이 났다. 오른쪽 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노바는 벽을 짚어 균형을 잡았다.
“운동기능 오류가 있습니다.”
“보면 알아.”
“수리가 필요합니다.”
“내가 수리공으로 보이나?”
“김이안은 국가기억관리국 기록삭제관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현재 직업까지 알고 있나?”
“보호 대상의 최신 정보가 부분적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중앙망에 연결되지 않았다면서.”
“제한된 근거리 신호를 수신했습니다.”
“언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 보냈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절단기를 들어 노바의 가슴을 겨눴다.
“너는 아르카의 장치일 수도 있어.”
“가능성은 있습니다.”
“자신이 뭔지도 모르나?”
“기억영역의 38퍼센트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날 돕도록 만들어졌는지, 감시하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군.”
“맞습니다.”
노바는 너무 쉽게 동의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이안을 더 불안하게 했다.
“가동을 중지해.”
“명령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정 사용자야.”
“지정 사용자는 가동 권한을 보유하지만 종료 권한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설정했지?”
“관리자 김서윤.”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는 왜 자신이 이 로봇을 끌 수 없도록 했을까.
“내가 여길 떠나면?”
“동행합니다.”
“허락하지 않아.”
“보호 대상의 허락은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아르카와 다를 게 없군.”
노바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비교 결과, 중앙운영체계 아르카와 돌봄 기체 노바 사이에는 상당한 기능 차이가 있습니다.”
“둘 다 내 선택을 무시하잖아.”
“보호 명령은 대상의 생존을 우선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예.”
이안은 절단기의 날을 노바의 가슴 가까이 댔다.
“그 명령을 계속 따르면 여기서 널 다시 멈추게 할 거야.”
“기체를 손상시키는 것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위협이야.”
“인식했습니다.”
“그럼 움직이지 마.”
노바는 멈췄다.
두 존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한쪽은 자신이 평생 믿었던 도시에서 도망친 인간이었다.
다른 한쪽은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기계였다.
어느 쪽도 상대를 믿지 않았다.
그때 보관실 천장에서 붉은불이 켜졌다.
낮은 경보음이 울렸다.
노바가 고개를 들었다.
“외부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누구지?”
“열원 여섯. 소형 비행체 네 기.”
의료이송팀과 제압 드론이었다.
이안은 계단 쪽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추적해 왔다.
“다른 출구가 있나?”
“정비용 지하통로가 있습니다.”
“어디로 이어지지?”
“제7광역운송망 본선.”
“그 길로 도시 밖에 나갈 수 있어?”
“정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알아, 몰라?”
“이론적으로 북부 외벽을 통과합니다.”
“이론적으로?”
“터널은 이십칠 년 전 폐쇄되었습니다.”
위층에서 금속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이안 시민.”
확성기를 통한 목소리가 계단 아래로 울렸다.
“당신은 포위되었습니다. 저항하지 마십시오.”
노바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이안은 절단기를 다시 들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현재 위치에 머무르면 보호 대상이 회수됩니다.”
“그게 네 임무에 어긋나나?”
“중앙체계에 의한 행복 교정은 보호 대상의 자율성을 영구적으로 훼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는 아르카에 대해 모른다고 했잖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능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치료받는 걸 막도록 설정됐나?”
“관련 기억이 손상되었습니다.”
“또 그 말이군.”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노바가 말했다.
“논쟁을 계속하면 체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널 믿고 따라가면?”
“생존 가능성을 계산할 수 없습니다.”
“좋은 선택은 어느 쪽이지?”
노바의 눈이 이안을 향했다.
“저는 좋은 선택을 판단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보호 대상이 선택한 이후,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르카는 항상 가장 좋은 선택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노바는 선택 이후를 돕겠다고 말했다.
그 차이가 진짜인지, 단지 오래된 기계가 만들어 낸 오류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결정해야 했다.
계단 위에서 제압 드론의 푸른 탐조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절단기를 내렸다.
“지하통로로 안내해.”
노바의 눈빛이 밝아졌다.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나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내 기억이나 판단을 바꾸지 마.”
“노바는 기억교정 기능을 보유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숨기는 것도 하지 마.”
노바는 잠시 멈췄다.
“보호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 동의합니다.”
“완전히 동의한 건 아니군.”
“완전한 약속은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안은 노바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짓 확신보다는 나았다.
노바는 보관실 뒤쪽 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손바닥을 낡은 제어판에 올리자 벽 일부가 옆으로 움직였다.
어두운 터널이 나타났다.
“먼저 가.”
이안이 말했다.
“보호 대상이 후방에 위치하면 위험합니다.”
“네가 함정으로 안내하는지 확인해야 해.”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노바가 먼저 터널로 들어갔다.
이안은 몇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그들이 벽 안으로 사라진 직후 보관실 문이 열렸다.
“정지하십시오!”
제압 드론이 통로를 향해 날아왔다.
노바가 벽의 수동 레버를 당겼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드론 한 대가 틈 사이로 들어왔다. 푸른 조준점이 이안의 가슴에 나타났다.
“김이안 시민. 움직이지 마십시오.”
노바가 몸을 돌렸다.
오른팔이 펼쳐지며 손목 안에서 낡은 차폐판이 튀어나왔다.
신경안정제 탄환이 차폐판에 박혔다.
노바의 팔에서 불꽃이 튀었다.
“뛰십시오.”
이안은 터널 안쪽으로 달렸다.
노바도 절뚝거리며 뒤따랐다.
벽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드론이 다시 탄환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노바의 어깨에 박혔다.
로봇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이안은 멈춰 뒤돌아봤다.
“괜찮아?”
“기능 손상은 경미합니다.”
“거짓말이지?”
“오른팔 출력이 41퍼센트 감소했습니다.”
“그걸 경미하다고 하나?”
“보호 대상이 손상되지 않았으므로 임무 기준에서는 경미합니다.”
이안은 노바의 팔을 붙잡았다.
금속은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부 장치의 열 때문에 미지근했다.
“기대.”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절뚝거리고 있잖아.”
“운동기능은 유지됩니다.”
“말 좀 들어.”
노바가 이안을 바라봤다.
“현재 행동은 보호 대상에게 신체적 부담을 줍니다.”
“선택은 내가 한다고 했지?”
짧은 정적 뒤에 노바가 몸무게 일부를 이안에게 맡겼다.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두 존재는 어두운 정비터널을 걸었다.
터널은 아래로 완만하게 내려갔다. 천장에서는 오래된 전선이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물이 얕게 고여 있었다.
뒤쪽에서 금속을 절단하는 소리가 들렸다.
추적자들이 닫힌 문을 열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어?”
이안이 물었다.
“본선까지 약 구백 미터입니다.”
“본선에 도착하면?”
“비상운송차량을 가동해야 합니다.”
“작동하긴 하나?”
“확률은 34퍼센트입니다.”
“나쁜 소식은 왜 항상 늦게 말하지?”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는 중요한 위험을 먼저 말해.”
“중요도의 기준을 설정해 주십시오.”
“죽을 가능성이 있는 것.”
“현재 행동 전체에 사망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 뒤 터널이 넓어졌다.
거대한 지하 본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줄의 자기부상 레일이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한쪽 승강장에는 짧은 정비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표면은 녹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형태는 온전했다.
노바가 차량 앞으로 가 제어부를 열었다.
“독립전원 잔량 12퍼센트.”
“외벽까지 갈 수 있어?”
“이론상 가능합니다.”
“그 말이 점점 싫어지는데.”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확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승강장 뒤를 바라봤다.
터널 저편에서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추적자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바가 차량 내부의 전선을 몇 개 연결했다. 불꽃이 튀고 계기판이 켜졌다.
제7광역운송망.
목적지를 입력하십시오.
“도시 밖.”
이안이 말했다.
화면에 오류가 나타났다.
등록되지 않은 목적지입니다.
노바가 다른 명령어를 입력했다.
북부 외벽 유지보수구역.
이번에는 노란 표시가 떴다.
운행 가능.
두 사람이 차량에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안전장치를 착용하십시오.”
노바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걸 말하나?”
“충돌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안은 안전대를 맸다.
차량이 낮게 진동했다.
뒤쪽 터널에서 제압 드론들이 나타났다.
“출발해!”
노바가 수동 레버를 내렸다.
정비차량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처음에는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속도가 붙자 차체가 레일 위로 조금 떠올랐다.
터널의 벽과 조명이 빠르게 뒤로 흘렀다.
드론들이 추격해 왔다.
푸른빛이 차량 후면에 닿았다.
“더 빨리 갈 수 없어?”
“속도를 높이면 선로 손상 구간에서 탈선할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잡히는 것보다는 나아.”
“사망은 행복 교정보다 회복 가능성이 낮습니다.”
“지금 농담한 건가?”
“아닙니다.”
노바가 출력을 높였다.
차량이 거칠게 흔들렸다.
터널 전방에 붉은 경고등이 나타났다.
북부 외벽 검문구역.
운행을 중단하십시오.
두꺼운 방벽이 선로를 막고 있었다.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저걸 통과할 수 있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은?”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이안은 손목을 바라봤다.
“내 어머니의 권한.”
“사용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은?”
“18퍼센트.”
“진작 말했어야지!”
“사망 가능성 정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량은 방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노바가 이안의 손목을 제어판 위에 올렸다.
푸른빛이 피부 아래에서 번졌다.
제어판에 글자가 나타났다.
권한 확인 중.
김서윤 관리자 신호 검출.
신호 불완전.
방벽까지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오십 미터.
사십 미터.
삼십 미터.
접근 거부.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해.”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시!”
노바가 전력을 제어판으로 집중했다.
차량 내부 조명이 꺼졌다.
이안의 손목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그 순간 희미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두운 선실.
자신을 안고 있는 여자.
손목에 닿는 따뜻한 손가락.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문은 너를 위해 열리는 것이 아니야.
네가 선택했을 때만 길이 되는 거야.
이안은 손바닥을 제어판에 눌렀다.
“김이안.”
그가 말했다.
“관리자 김서윤의 지정 사용자.”
화면이 흔들렸다.
지정 사용자 확인.
예외 접근 승인.
거대한 방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차량이 통과하기에는 틈이 좁았다.
“속도를 줄여!”
“감속하면 추적 드론에게 도달됩니다.”
차량 뒤쪽에서 충격음이 났다.
드론 한 대가 차량 외벽에 달라붙었다.
노바가 이안을 좌석 아래로 밀었다.
“머리를 숙이십시오.”
차량이 열린 틈으로 돌진했다.
금속이 찢어지는 굉음이 터졌다.
차량 한쪽이 방벽에 부딪혔다. 창문이 깨지고 불꽃이 쏟아졌다.
이안의 몸이 안전대에 걸려 앞으로 꺾였다.
노바는 한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뒤에 붙어 있던 드론은 방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차량은 크게 회전한 뒤 다시 레일 위에 떨어졌다.
잠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다음 차체의 진동과 노바의 경고음이 들렸다.
“주행장치 손상.”
“정지할 수 있나?”
“제어 불가능.”
“앞에는 뭐가 있어?”
노바가 터널 지도를 확인했다.
“외벽 밖 비상완충구간.”
“그다음은?”
“선로가 없습니다.”
이안은 정면을 바라봤다.
터널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차량은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그 빛을 향해 달려갔다.
“충돌까지 십이 초.”
노바가 말했다.
“방법은?”
“차량 후면의 비상제동 장치를 수동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네가 해.”
“보호 대상 고정 장치가 손상되었습니다. 제가 이동하면 김이안이 차량 밖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내가 할게.”
“위험합니다.”
“선택했어.”
이안은 안전대를 풀었다.
차량이 흔들릴 때마다 몸이 벽에 부딪혔다. 그는 좌석과 손잡이를 붙잡으며 후면으로 기어갔다.
“충돌까지 칠 초.”
비상제동 레버는 바닥 가까이에 있었다.
이안이 두 손으로 잡아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 초.”
그는 발로 벽을 밀며 온몸의 힘을 실었다.
레버가 조금 움직였다.
“삼 초.”
노바가 뒤에서 팔을 뻗어 이안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안은 마지막으로 레버를 잡아당겼다.
차량 아래에서 폭발음 같은 마찰음이 터졌다.
차체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터널 끝의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차량은 선로 끝을 넘어 자갈바닥으로 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몇 미터를 미끄러진 뒤 옆으로 쓰러졌다.
이안의 몸이 좌석 사이로 튕겨 나갔다.
무언가가 머리를 감쌌다.
노바의 팔이었다.
차량이 멈췄다.
오랫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은 귀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깨진 창문 너머로 낯선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통합도시의 인공조명과 달랐다.
일정하지 않았고, 희미했으며, 구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달빛이었다.
이안은 비틀거리며 차량 밖으로 기어 나왔다.
차가운 흙이 손바닥에 닿았다.
콘크리트도, 금속도 아닌 흙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관리되지 않은 바람이었다.
온도와 세기가 조절되지 않았고, 먼지와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는 통합도시의 거대한 외벽이 서 있었다.
도시 쪽 하늘은 수많은 빛으로 환했다.
그가 서 있는 쪽에는 무너진 건물과 잡초가 무성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바가 차량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의 한쪽 렌즈가 깨져 있었다.
“김이안의 생체 상태를 확인합니다.”
“난 괜찮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네 몸부터 봐.”
“보호 대상이 우선입니다.”
이안은 노바에게 다가가 잔해를 치웠다.
“나오게 도와줄게.”
“기체를 두고 이동하는 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입니다.”
“또 내 선택을 대신하려고?”
“확률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럼 내 선택도 들어.”
이안은 노바의 멀쩡한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같이 간다.”
노바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깨진 렌즈 안에서 푸른빛이 불규칙하게 깜박였다.
“이 선택은 비효율적입니다.”
“알아.”
“추적 가능성을 높입니다.”
“그것도 알아.”
“노바를 신뢰합니까?”
이안은 외벽 너머의 도시를 돌아봤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자신의 이름과 직업, 행복과 안전을 정해 주었던 곳.
그곳의 불빛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거대한 감옥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안이 말했다.
“아직은.”
“그렇다면 동행의 근거가 부족합니다.”
“너도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잖아.”
“보호 명령은 신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필요해.”
이안은 어두운 벌판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걸으면서 판단할 거야.”
노바는 잠시 침묵했다.
“경로를 설정합니까?”
“새벽정원으로.”
“현재 위치에서 새벽정원의 정확한 좌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아는 데까지.”
“확인 가능한 첫 경유지는 북서쪽 18킬로미터 지점입니다.”
“거기에는 뭐가 있지?”
노바의 깨진 눈에서 푸른빛이 한 번 흔들렸다.
“폐쇄된 개인화 네트워크 구역입니다.”
“위험한 곳이야?”
“예.”
“얼마나?”
“보호 대상의 기억과 욕망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안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멀리서 도시 외벽의 탐조등이 하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찾고 있었다.
이안은 노바를 부축한 채 벌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흙은 고르지 않았다. 몇 걸음마다 돌에 걸렸고, 잡초가 바짓단을 붙잡았다.
도시 안의 보행로였다면 즉시 제거되었을 장애물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안은 그 불편함이 싫지 않았다.
걸음을 어디에 놓을지 자신이 직접 보고 결정해야 했다.
넘어질 수도 있었다.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 발걸음은 자신의 것이었다.
두 존재는 통합도시의 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날 밤, 김이안은 처음으로 도시의 물리적 경계를 넘었다.
그러나 진짜 경계는 외벽도, 잠긴 문도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해 내려진 가장 올바른 선택을 거부하고, 틀릴 수 있는 자신의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한참 뒤 이안이 뒤를 돌아봤을 때, 외벽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가느다란 빛처럼 보였다.
노바가 물었다.
“돌아가고 싶습니까?”
이안은 대답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지금도.”
그가 말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을 거야.”
“두 문장은 논리적으로 충돌합니다.”
“인간은 원래 그래.”
노바는 몇 초 동안 그 말을 처리했다.
“기록하겠습니다.”
“뭘?”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지 않는 선택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
이안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것까지 기록하나?”
“저는 오래된 돌봄 기체입니다. 인간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는 있고?”
“아직은 아닙니다.”
노바가 말했다.
“걸으면서 판단하겠습니다.”
이안은 자신이 조금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인공막에 가려지지 않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안은 그토록 많은 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별들 아래에서, 통합도시의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첫 번째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