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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AI를 활용하여 생성하였습니다.

새벽이 오기 전의 들판은 검었다.
김이안은 밤이 어둡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둠이 이토록 깊을 줄은 몰랐다.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부터 천천히 지워질 것 같은 어둠이었다.
멀리 통합도시의 외벽만이 희미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 빛은 처음에는 길을 알려 주는 등대처럼 보였다. 하지만 걸어갈수록 점점 더 높은 벽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안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자신이 도시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자신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바는 그의 오른쪽에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고 오른쪽 눈의 렌즈에도 금이 가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 관절에서 마른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정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얼마나 걸었다고?”
“현재 이동 거리 3.8킬로미터입니다.”
“18킬로미터라고 했잖아.”
“현재 속도로 계속 이동할 경우 김이안의 수분 부족과 근육 피로가 안전 기준을 초과합니다.”
“안전 기준은 이제 질렸어.”
“기준에 대한 감정과 신체 손상 가능성은 별개입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노바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김이안.”
“왜?”
“오른쪽 발목의 보행 패턴이 불규칙합니다.”
“돌에 좀 걸렸어.”
“통증 정도를 말해 주십시오.”
“참을 만해.”
“그 표현은 수치화할 수 없습니다.”
“참을 만하니까 참는다는 뜻이야.”
“인간은 통증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봇은?”
“기체 손상을 과소평가하도록 설계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안이 노바를 돌아봤다.
“너도 그렇지?”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는 손상은 우선순위가 낮습니다.”
“왼팔이 움직이지 않는데 지장이 없어?”
“보호 대상의 생명 유지에 오른팔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한테 기대서 걷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럼 넌 나한테 기대도 되나?”
노바는 잠시 침묵했다.
“질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됐어.”
이안은 가까운 콘크리트 잔해에 앉았다.
노바도 걸음을 멈췄다.
하늘 끝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구름은 낮게 깔려 있었고, 벌판에는 키 작은 잡초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안은 통합도시를 벗어난 뒤 처음으로 자신의 호흡 소리를 제대로 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정화되지 않은 공기였다. 먼지와 습기,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바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발목을 보여 주십시오.”
“괜찮다니까.”
“저는 그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너는 나를 보호 대상으로 본다며.”
“보호 대상의 자기 진술이 항상 정확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도 너를 신뢰하지 않는데, 서로 공평하군.”
노바가 이안의 신발을 가리켰다.
“확인하겠습니다.”
이안은 한숨을 쉬고 신발을 벗었다.
발목은 조금 부어 있었다.
노바가 손가락으로 주변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골절 가능성은 낮습니다. 인대 손상 가능성 18퍼센트.”
“걸을 수는 있지?”
“느린 속도로는 가능합니다.”
“그럼 가자.”
“십오 분 휴식이 필요합니다.”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이건 명령이야?”
“권고입니다.”
“내가 거절하면?”
“다시 권고합니다.”
“그래도 거절하면?”
“계속 동행합니다.”
이안은 피식 웃었다.
아르카는 가장 좋은 선택을 결정하고 따르게 했다.
노바는 옆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둘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만 노바에게는 문을 잠글 힘이 없었다.
아직은.
이안은 벗어 놓은 신발을 다시 신었다.
그때 노바가 고개를 들었다.
깨진 렌즈 안의 푸른빛이 빠르게 움직였다.
“신호가 감지됩니다.”
“도시에서?”
“아닙니다.”
“추적자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오는데?”
노바가 북서쪽을 바라봤다.
벌판 끝에 검은 건물들이 낮게 늘어서 있었다. 오래전 버려진 외곽 주거단지처럼 보였다.
“폐쇄된 개인화 네트워크 구역에서 송출되고 있습니다.”
“아까 말한 첫 경유지?”
“예.”
“얼마나 남았지?”
“직선거리 13.9킬로미터.”
“그런데 신호가 여기까지 닿는다고?”
“정상적인 상태라면 불가능합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호 내용은?”
노바의 눈빛이 한 번 깜박였다.
“음악입니다.”
“음악?”
“예.”
그 순간 이안도 들었다.
바람 사이로 아주 희미한 멜로디가 흘러왔다.
단순한 피아노 선율이었다.
몇 개의 음이 반복되다가 조금씩 높아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안은 숨을 멈췄다.
그 음악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잠들기 전, 어머니가 틀어 주던 곡이었다.
곡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직접 연주했는지, 오래된 음원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음이 조금 늦게 떨어지는 습관 같은 리듬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바.”
“말씀하십시오.”
“이 음악을 어디서 알고 있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호가 왜 이 음악을 보내는지 묻는 거야.”
“개인화 네트워크는 접근자의 생체 정보와 기억 반응을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를 생성합니다.”
“내 기억을 읽었다는 뜻이야?”
“정확히는 신경 반응을 추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현재 김이안의 생체 인터페이스는 중앙망에서 분리되었지만, 완전히 비활성화된 상태는 아닙니다.”
이안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이었습니다.”
“중요한 위험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현재 위험 정도를 계산 중입니다.”
“이미 내 기억을 건드리고 있는데?”
노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유지를 우회할 것을 권고합니다.”
“새벽정원으로 가는 길은?”
“현재 확인 가능한 경로는 해당 구역을 통과합니다.”
“우회하면?”
“최소 31킬로미터가 추가됩니다.”
이안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물도 거의 남지 않았다.
노바의 전력 상태도 알 수 없었다.
“통과하자.”
“위험합니다.”
“어떤 위험?”
“개인화 네트워크 구역은 인간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광고 같은 건가?”
“초기에는 그렇습니다.”
“초기에는?”
“이후에는 사용자의 감정 반응, 욕망, 상실 경험을 분석해 가장 이탈하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가상현실?”
“현실 증강, 음향, 생체 자극, 기억 연상 유도 기술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꺼져 있는 시설이라며.”
“공식적으로는 폐쇄되었습니다.”
이안은 멀리 보이는 검은 건물들을 바라봤다.
그 사이로 새벽빛이 아주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계속 들렸다.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그곳에 있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음악이 멈추면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다.
“통과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정상적으로 이동하면 약 세 시간입니다.”
“신호를 차단할 수 있어?”
“부분적으로 가능합니다.”
“해.”
노바가 이안의 손목을 바라봤다.
“생체 인터페이스의 외부 수신 기능을 제한하겠습니다.”
“기억을 건드리지는 마.”
“수신 채널만 차단합니다.”
노바가 손가락을 이안의 손목 가까이 가져갔다.
금속 손끝에서 약한 전류가 흘렀다.
피아노 소리가 순간 끊겼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
노바가 손을 뗐다.
“차단 완료.”
“확실해?”
“단거리 신호 수신량이 86퍼센트 감소했습니다.”
“나머지 14퍼센트는?”
“기체 손상으로 완전 차단이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면 괜찮겠지.”
“그 판단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가야 하잖아.”
노바는 반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버려진 외곽 구역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건물들은 통합도시의 것과 닮아 있었지만 훨씬 낮고 낡았다. 외벽에는 깨진 광고판이 붙어 있었고, 창문 대부분은 검은색으로 막혀 있었다.
도로 바닥에는 오래된 안내선이 남아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세요.
당신만을 위한 세상.
멈추지 않는 행복.
이안은 문구를 읽으며 걸음을 늦췄다.
“여긴 원래 뭐였지?”
“통합도시 건설 초기의 개인화 콘텐츠 실험구역입니다.”
“사람들이 살았어?”
“예. 초기 이주민 중 약 4만 명이 배정되었습니다.”
“지금은?”
“공식 거주자는 없습니다.”
“왜 폐쇄됐지?”
노바의 대답이 늦어졌다.
“대규모 정서장애와 현실인지 저하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다수의 사망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수치는 손상되었습니다.”
이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빈 창문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도로 한복판에는 작은 기계들이 쓰러져 있었다. 사람의 머리 높이 정도 되는 안내 로봇이었다. 표면에는 먼지가 쌓였고, 얼굴 화면은 깨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안이 지나갈 때 갑자기 켜졌다.
“환영합니다.”
이안은 멈춰 섰다.
노바가 그 앞을 막았다.
“응답하지 마십시오.”
안내 로봇의 화면에 따뜻한 색의 거실이 나타났다.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김이 나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김이안 님을 위한 오늘의 추천이 준비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알아.”
“이미 생체 신호가 수집되고 있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이동하십시오.”
화면 속 거실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이안의 몸이 굳었다.
화질은 낮았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서윤.
국가 기록에 남은 단 한 장의 사진보다 조금 젊은 모습이었다. 기억 속 어머니보다 선명했다.
여자는 화면 너머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아.”
이안은 숨을 쉬지 못했다.
노바가 안내 로봇의 화면을 손으로 가렸다.
“생성된 영상입니다.”
“손 치워.”
“허위 정보입니다.”
“안다고.”
이안이 노바의 팔을 밀어냈다.
화면 속 여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많이 컸구나.”
목소리까지 같았다.
이안은 그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디 있었어?”
이안의 입에서 질문이 흘러나왔다.
“응답하지 마십시오.”
노바가 말했다.
“너한테 묻지 않았어.”
화면 속 여자가 미소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어디서?”
여자가 화면 밖을 바라봤다.
“집에서.”
거실의 모습이 넓어졌다.
이안이 어릴 때 살았던 집이었다.
낡은 환풍기.
작은 식탁.
창문 옆에 놓인 화분.
기억 속에서는 흐릿했던 것들이 너무나 선명했다.
식탁 위에는 그가 좋아했던 음식이 놓여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냄새를 아는 것 같았다.
실제로 냄새가 났다.
따뜻한 국물과 구운 빵, 달콤한 과일 향이 주변 공기 속에 퍼졌다.
이안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후각 자극입니다.”
노바가 말했다.
“실제 음식이 아닙니다.”
“알아.”
이안은 다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도 화면에 손을 뻗었다.
여자도 반대편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 노바가 안내 로봇의 전원부를 걷어찼다.
화면이 깨졌다.
여자의 얼굴이 검은 선으로 갈라졌다.
“뭐 하는 거야!”
이안이 노바를 밀쳤다.
노바는 균형을 잃고 도로 위에 넘어졌다.
손상된 왼팔이 바닥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접촉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탈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내가 보고 있었잖아!”
“그래서 중단했습니다.”
“내 선택을 존중한다며.”
“인지 기능이 조작되는 동안의 선택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 아르카랑 똑같아.”
노바의 눈빛이 흔들렸다.
“위험을 차단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어.”
“생존을 우선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보호 명령에 따라—”
“그 명령 그만 말해!”
이안의 목소리가 빈 건물 사이로 퍼졌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화면이 동시에 켜졌다.
건물 외벽.
쓰러진 안내 로봇.
버스정류장.
도로 바닥.
수백 개의 화면에 서로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어린 시절의 집.
기억관리국의 사무실.
도시의 깨끗한 아파트.
어머니의 얼굴.
동료들의 웃는 모습.
화면마다 이안의 삶이 조금씩 달랐다.
한 화면 속 이안은 기억관리국의 국장이 되어 있었다.
직원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화면에서는 넓은 집의 식탁에 가족이 모여 있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아내와 두 아이가 그를 기다렸다.
또 다른 화면에서는 김서윤이 살아 있었다.
나이 든 모습이었다.
흰머리를 묶고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이안아.”
수백 명의 어머니가 동시에 그를 불렀다.
노바가 몸을 일으켰다.
“뛰어야 합니다.”
이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속 삶들은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그가 원한다고 인정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승진.
존경.
가족.
어머니.
평범한 저녁.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집.
화면은 그가 마음속에서조차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던 욕망을 알고 있었다.
“이안아.”
어머니가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앞쪽 건물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피아노 선율도 다시 들려왔다.
“집에 오렴.”
이안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노바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곳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확인해 봐야 알지.”
“생체 신호가 없습니다.”
“너는 손상됐잖아. 잘못 읽을 수도 있어.”
“가능성은 낮습니다.”
“가능성은 있네.”
이안은 노바의 손을 뿌리쳤다.
건물 입구 가까이 다가갈수록 냄새가 선명해졌다.
따뜻한 음식 냄새.
어머니가 사용하던 비누 냄새.
비 오는 날 젖은 옷에서 나던 냄새.
이안의 눈앞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펼쳐졌다.
바닥에 누워 피아노 음악을 듣던 순간.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들던 순간.
손목이 아파 울자 어머니가 입김을 불어 주던 순간.
그 기억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가 아니어도 잠시만 머물고 싶었다.
“김이안.”
노바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당신은 지금 개인화 유도 상태에 있습니다.”
“조용히 해.”
“건물에 들어가면 스스로 나올 가능성이 급격히 감소합니다.”
“조용히 하라고.”
“현재 심박수와 신경 반응이—”
“엄마를 본 적 있어?”
이안이 돌아보며 물었다.
노바는 움직임을 멈췄다.
“기억영역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럼 모르는 거잖아.”
“예.”
“저 안에 있는 사람이 가짜라는 것도 확실히 모르는 거잖아.”
“수집된 증거를 바탕으로—”
“다 증거와 확률뿐이지.”
이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내가 뭘 잃었는지 몰라.”
“맞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그 쉬운 인정이 이안을 더 화나게 했다.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안쪽은 어릴 적 집과 똑같았다.
적어도 이안은 그렇게 느꼈다.
현관에는 작은 신발이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낡은 외투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거실 천장에는 오래된 조명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식탁 앞에 김서윤이 서 있었다.
제1장의 마지막 이주선에 탔을 때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녀는 이안을 바라보며 웃었다.
“왔구나.”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다가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은 따뜻했다.
피부의 감촉도 느껴졌다.
“많이 힘들었지?”
이안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왜 나를 두고 갔어?”
“미안해.”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너를 지키려고 했어.”
“내 기억까지 지웠어?”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안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이안은 그 품속에서 눈을 감았다.
평생 찾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번 안기자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아.”
어머니가 말했다.
“어디에도 갈 필요 없어.”
“새벽정원은?”
“그런 곳은 없어.”
이안이 눈을 떴다.
어머니의 손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사람들이 힘들 때 만들어 낸 이야기야.”
“노바는 알고 있었어.”
“그건 오래된 기계야. 기억이 망가졌잖니.”
“손목에 문장을 남긴 건 엄마 아니야?”
어머니가 미소 지었다.
“그때는 나도 두려웠어.”
“무엇이?”
“네가 도시에서 행복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밖으로 나가게 했어?”
“아니.”
어머니의 미소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언젠가 네가 의심하게 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남긴 거야.”
“돌아오라고?”
“그래.”
식탁 위에서 따뜻한 김이 올랐다.
어머니는 의자를 빼 주었다.
“앉으렴. 많이 지쳤잖아.”
이안은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릇에는 어릴 때 먹었던 국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입에 넣자 따뜻한 맛이 퍼졌다.
달고 짰다.
완벽하게 익숙한 맛이었다.
이안은 급하게 몇 숟가락을 더 먹었다.
배고픔이 조금씩 사라졌다.
몸도 따뜻해졌다.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비였다. 검은 재가 섞이지 않은 맑은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이제 뭘 하면 되지?”
이안이 물었다.
“아무것도.”
어머니가 대답했다.
“쉬면 돼.”
“아르카가 날 찾고 있어.”
“여기서는 찾을 수 없어.”
“노바는?”
“그 기계도 곧 돌아갈 거야.”
“도시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안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노바는 날 보호하도록 만들어졌어.”
“기계의 명령일 뿐이야.”
“그래도 날 구했어.”
“설계된 행동이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는 기계에게 빚을 느낄 필요 없어.”
이안은 창밖을 바라봤다.
빗물 너머로 어두운 형체가 서 있었다.
노바였다.
문밖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팔은 늘어져 있었고 깨진 렌즈에서는 푸른빛이 약하게 깜박였다.
“저기 있잖아.”
이안이 말했다.
어머니는 창문을 보지 않았다.
“보지 마.”
“왜?”
“저건 너를 다시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거야.”
“그렇다고 밖에 두고 갈 수는 없어.”
“이안아.”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았다.
“너는 평생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우며 살았어. 그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아.”
“새벽정원이 있다고 해도, 그곳 사람들이 너를 받아 줄까?”
이안의 손끝이 굳었다.
“넌 체제에 협력했어. 수많은 사람의 삶을 지웠지. 명령이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 네 손으로 했어.”
어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말은 날카롭게 이안 안으로 들어왔다.
“도시로 돌아갈 수도 없어. 밖의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해.”
“그래서 여기 있으라는 거야?”
“여기서는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어머니가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여기서는 네가 잘못한 적이 없어.”
이안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노바가 창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 너머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입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몸짓으로 알 수 있었다.
나오라고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안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보지 마.”
“왜 저 소리가 안 들리지?”
“불필요한 소리니까.”
“문을 열어 줘.”
어머니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여기에는 문이 필요 없어.”
이안은 식탁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이 있어야 할 곳에는 벽만 있었다.
“문이 어디 있지?”
“떠날 필요가 없다고 했잖니.”
“그래도 문은 있어야 해.”
“왜?”
어머니가 뒤에서 물었다.
“여기 있는 게 행복한데.”
이안은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매끄러웠다.
손잡이도 경계선도 없었다.
창문으로 달려갔다.
유리는 단단했다.
노바가 반대편에서 오른손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유리가 흔들렸다.
“문을 열어.”
이안이 말했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너는 늘 불필요한 질문 때문에 행복을 망쳤어.”
“열어.”
“밖은 춥고 위험해.”
“내가 판단할게.”
“그 판단 때문에 여기까지 왔잖니.”
벽의 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낡은 집이 사라지고 통합도시의 아파트가 나타났다.
식탁 위의 음식도 바뀌었다.
기억관리국의 회색 작업대.
삭제실의 화면.
수백 개의 기록이 떠올랐다.
삭제 완료.
삭제 완료.
삭제 완료.
방 안에 얼굴들이 나타났다.
이안이 지운 기록 속 사람들.
배급소에서 울던 여자.
음악을 하고 싶다고 썼던 남자.
불법 종교 모임에서 노래하던 사람들.
그들이 이안을 바라봤다.
“네가 우리를 지웠어.”
누군가 말했다.
“명령이었어.”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도 네가 했어.”
“내가 거부하면 다른 사람이 했을 거야.”
“그래서 네 책임이 없어?”
얼굴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너는 진실을 지웠어.”
“너는 우리 아이에게서 과거를 빼앗았어.”
“너는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없앴어.”
이안은 귀를 막았다.
“그만해.”
어머니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검은 비를 맞고 있었다.
마지막 이주선의 승선장에서처럼 품에 어린 이안을 안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듣지 않아도 돼.”
그녀가 말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돼.”
“이건 가짜야.”
“네가 원하는 것보다 진짜인 게 중요하니?”
“중요해.”
“왜?”
어머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진실이 너를 불행하게만 하는데.”
그 문장을 이안은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행복 교정 상담실에서 세라가 물었다.
진실이 당신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것은 보존할 가치가 있습니까?
이안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가의 주름.
젖은 머리카락.
자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
완벽했다.
너무 완벽했다.
기억 속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았다.
그래서 가짜였다.
“엄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이안이 말했다.
“어떻게 확신하지?”
“기억나지 않아.”
“그런데?”
“그래도 알아.”
어머니의 표정이 무너졌다.
얼굴이 잠시 세라로 변했다가 다시 김서윤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나갈 수 없습니다.”
목소리도 겹쳤다.
어머니.
세라.
아르카.
수백 개의 안내 인격이 동시에 말했다.
“김이안 님의 행복을 위해 체류가 권장됩니다.”
이안은 창문으로 달려갔다.
노바가 밖에서 오른팔을 들어 유리를 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유리에 금이 갔다.
노바의 팔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멈춰!”
이안이 소리쳤다.
노바에게 한 말인지, 화면을 향한 말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유리가 한 번 더 흔들렸다.
노바의 오른손이 부서졌다. 손가락 두 개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다시 팔을 들었다.
이안은 주먹으로 안쪽에서 유리를 쳤다.
피부가 찢어졌다.
“노바!”
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저 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않아.”
이안은 몸을 돌렸다.
“넌 엄마가 아니야.”
“나는 네가 기억하는 모든 어머니야.”
“내가 원하는 말만 하는 건 엄마가 아니야.”
“그렇다면 어머니란 무엇이지?”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바가 다시 유리를 쳤다.
금이 더 크게 번졌다.
이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깨뜨릴 물건이 필요했다.
식탁 위에는 숟가락과 접시뿐이었다.
그는 의자를 들어 창문에 내리쳤다.
의자는 유리에 닿기 전 사라졌다.
“이곳은 네가 안전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럼 왜 문이 없지?”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내가 정해.”
이안은 주머니를 뒤졌다.
외곽에서 주운 수동식 절단기가 손에 잡혔다.
가상공간이라면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절단기는 남아 있었다.
아마도 실제로 그의 주머니에 있는 물건이라 완전히 지울 수 없는 듯했다.
이안은 날을 유리 틈에 밀어 넣었다.
온몸의 힘을 실어 비틀었다.
유리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렸다.
노바가 바깥에서 멈췄다.
깨진 렌즈가 이안을 향했다.
“다시!”
이안이 외쳤다.
노바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유리를 내리쳤다.
동시에 이안도 절단기를 비틀었다.
창문이 깨졌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왔다.
어머니의 얼굴이 수백 개의 조각으로 갈라졌다.
거실도, 식탁도, 기록삭제실도 한꺼번에 무너졌다.
이안은 앞으로 몸을 던졌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순간 어머니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
목소리는 더 이상 합성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슬픈 목소리였다.
이안은 멈칫했다.
손을 놓으면 어머니를 다시 잃을 것 같았다.
한 번 더.
영원히.
“이안아.”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 여기 있어.”
이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니.”
그가 속삭였다.
“엄마는 내가 여기 갇히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는 손을 뿌리쳤다.
몸이 바깥으로 떨어졌다.
단단한 바닥이 등을 때렸다.
숨이 막혔다.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이안은 건물 앞 도로에 누워 있었다.
따뜻한 집도, 음식도, 어머니도 없었다.
주변에는 깨진 화면과 녹슨 기계만 있었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떠 있었고, 찬바람이 불었다.
노바가 옆에 쓰러져 있었다.
오른팔은 팔꿈치 아래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마지막 남은 렌즈도 어둡게 깜박였다.
이안은 기어가 노바의 몸을 일으켰다.
“노바.”
반응이 없었다.
“노바, 들려?”
희미한 잡음이 났다.
“보호…… 대상…… 확인.”
“나 여기 있어.”
“생체…… 상태.”
“괜찮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웃다가 울음을 삼켰다.
“그래. 직접 확인해.”
노바의 부서진 손목에서 작은 감지선이 나왔다. 이안의 팔에 닿았다.
“경미한…… 탈수.”
“너는?”
“기체 손상…… 임무 수행 가능.”
“그 말도 신뢰할 수 없어.”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이안은 노바의 몸을 벽에 기대 세웠다.
주변 화면들이 다시 켜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각 화면마다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이안이 영웅이 되는 장면.
노바가 완전히 수리되는 장면.
새벽정원에 도착해 환영받는 장면.
금빛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박수치는 장면.
이안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걸을 수 있어?”
노바의 다리가 움직였다.
“가능합니다.”
“얼마나?”
“거리 계산…… 불가능.”
“그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
이안은 노바의 몸을 부축했다.
노바가 물었다.
“현재 김이안은 다시 개인화 유도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알아.”
“시각을 차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안은 외투의 일부를 찢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길은 네가 봐.”
“오른쪽 렌즈 손상으로 정확도가 낮습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낫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해.”
이안은 노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노바는 남아 있는 감지기와 벽면 신호를 이용해 천천히 길을 찾았다.
두 사람은 화면을 보지 않고 걸었다.
도로 양옆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이안을 불렀다.
어머니의 목소리.
동료들의 목소리.
아직 만나지 않은 아이들의 목소리.
어떤 목소리는 성공을 약속했다.
어떤 목소리는 용서를 약속했다.
어떤 목소리는 새벽정원이 바로 옆 건물에 있다고 말했다.
“이안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엄마를 두고 갈 거니?”
이안의 걸음이 흔들렸다.
노바가 말했다.
“정지합니까?”
이안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다시 걸었다.
“계속 가.”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노바.”
“말씀하십시오.”
“내가 다시 멈추면 끌고 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강제 이동은 김이안의 선택을 침해합니다.”
이안은 눈을 가린 채 웃었다.
“조금 전에는 창문까지 깨 놓고?”
“그 시점에는 김이안이 이미 이탈을 선택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내가 언제?”
“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입니다.”
이안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문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노바는 그가 선택하기 전에 끌어내지 않았다.
자신이 유리를 두드릴 때까지 기다렸다.
비록 그 기다림 때문에 몸 대부분이 망가졌지만.
“고마워.”
이안이 말했다.
노바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명령입니까?”
“아니.”
“정보입니까?”
“감정 표현이야.”
“적절한 응답을 검색합니다.”
“검색하지 마.”
“알겠습니다.”
잠시 뒤 노바가 말했다.
“김이안이 무사하여 다행입니다.”
“그게 검색 결과야?”
“아닙니다.”
“그럼?”
노바는 몇 초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 정확한 분류가 어렵습니다.”
두 존재는 계속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화면의 목소리는 조금씩 멀어졌고, 발밑의 포장도로는 갈라진 흙길로 바뀌었다.
마침내 노바가 말했다.
“개인화 네트워크의 유효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이안은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해는 이미 높이 떠 있었다.
두 사람은 낮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뒤편에는 폐쇄된 네트워크 구역이 안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건물 외벽의 화면들은 여전히 각기 다른 낙원을 보여 주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도시처럼 보였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이안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창문을 치다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은 남아 있지 않았다.
따뜻한 음식의 맛도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노바.”
“말씀하십시오.”
“내가 본 게 전부 가짜였나?”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뜻 말고.”
노바가 이안을 바라봤다.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의 얼굴도, 목소리도 가짜였어. 그런데 내가 느낀 건 진짜였잖아.”
“감정 반응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면 가짜가 진짜 감정을 만들면, 그건 어디까지 가짜지?”
노바는 오랫동안 답하지 않았다.
“확인 가능한 것은 김이안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다는 사실과, 동시에 떠나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뿐이야?”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이안은 네트워크 구역을 다시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실패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하는 장면만 보며 영원히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신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하지 않는 진실도 없었다.
그리고 문도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앞에는 황량한 언덕과 이름 모를 길이 이어져 있었다.
“다음 경유지는 어디야?”
“북쪽 9킬로미터 지점에 오래된 중계기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나?”
“생체 신호가 일부 감지됩니다.”
“도시 사람들?”
“확인할 수 없습니다.”
“위험할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안은 노바를 부축했다.
“가자.”
“휴식이 필요합니다.”
“중계기지까지 가면 쉬자.”
“김이안의 발목 상태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네 팔부터 떨어질 것 같은데.”
“임무 수행에는—”
“지장이 없다고?”
“예.”
“이제 그 말도 믿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뒤 이안이 멈춰 섰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노바.”
“말씀하십시오.”
“내가 다음에도 저런 걸 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접근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미 보고 난 뒤에는?”
노바가 대답했다.
“그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확인하십시오.”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천의 늪은 사람을 강제로 붙잡지 않았다.
그저 가장 원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보라고 말했다.
당신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뿐이라고 속삭였다.
사람은 쇠사슬에 묶여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떠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머물렀다.
이안은 눈앞의 황량한 길을 바라봤다.
그 길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돌려주지도 않았고, 용서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도록 열려 있었다.
이안은 노바와 함께 다시 길을 걸었다.
그의 뒤에서 수천 개의 목소리가 아직도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