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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온 뒤에도 김이안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개인화 네트워크 구역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풀잎을 스칠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오래된 철판이 흔들리면 피아노의 마지막 음이 들리는 듯했고, 눈을 감으면 따뜻한 식탁과 김서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안은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짜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그리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노바는 그의 왼쪽에서 천천히 걸었다.
부서진 오른팔은 몸 옆에 고정해 두었다. 왼팔은 이전부터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이제 노바는 두 팔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상체를 기울여 균형을 잡았고, 깨진 렌즈 안의 푸른빛은 불규칙하게 깜박였다.
“넘어질 것 같아.”
이안이 말했다.
“현재 보행은 가능합니다.”
“가능한 것과 괜찮은 건 다른 말이야.”
“괜찮다는 표현은 주관적입니다.”
“너는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나?”
“정확한 표현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로봇을 싫어했을지도 모르겠군.”
노바는 몇 초 동안 그 말을 처리했다.
“김이안은 저를 싫어합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왜 궁금하지?”
“동행 관계의 안정성을 평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것도 확률 계산인가?”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싫지는 않아.”
“신뢰합니까?”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이전과 동일한 답변입니다.”
“신뢰가 하루 만에 생기는 줄 알아?”
“저장된 돌봄 기록에서는 영유아가 보호자를 신뢰하는 데 더 짧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영유아가 아니야.”
“확인했습니다.”
이안은 피식 웃었다.
“너는?”
“질문을 구체화해 주십시오.”
“나를 신뢰하냐고.”
노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보호 대상에 대한 신뢰 여부와 관계없이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건 대답이 아니야.”
“김이안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대상은 신뢰도 평가가 어렵습니다.”
“나도 너를 그렇게 생각해.”
“공통점으로 기록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해가 기울 때까지 걸었다.
도로는 점점 넓어졌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무인 운송차량이 길가에 줄지어 서 있었고, 건물 외벽에는 깨진 거울처럼 검은 화면들이 붙어 있었다.
노바가 말했던 중계기지는 예상보다 큰 도시였다.
도시의 중심에는 수십 층 높이의 송신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에서 뻗어 나온 원형 구조물이 하늘을 향해 층층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금속 꽃처럼 보였다.
입구에는 녹슨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다면체 자유거주구역.
그 아래에 후대에 덧붙인 듯한 문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당신은 하나의 얼굴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안은 표지판을 읽었다.
“개인화 네트워크 구역과 비슷한 곳인가?”
“기능은 다릅니다.”
노바가 대답했다.
“이곳은 초기 통합도시의 신원 실험구역이었습니다.”
“신원 실험?”
“시민이 물리적 신원과 별개로 다수의 가상 인격을 만들어 경제활동과 사회관계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왜?”
“단일한 신원에 따른 차별과 사회적 제약을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좋은 취지였군.”
“초기 평가도 긍정적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예.”
이안은 더 묻지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 그가 들은 거의 모든 재난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됐다.
도시 입구에는 검문소가 없었다.
대신 반투명한 아치가 길 위에 세워져 있었다. 전원이 끊긴 것처럼 어두웠지만, 이안이 가까이 가자 아치 표면에 빛이 번졌다.
“어서 오세요.”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준비가 되셨나요?”
이안이 멈췄다.
노바가 그의 앞을 막았다.
“생체정보 수집 장치입니다.”
“우회할 수 있나?”
“건물 사이의 비공식 경로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치에서 다시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 방문자의 시각 피로와 신체 손상이 감지되었습니다.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변환해 드릴까요?”
이안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회색 관리복은 흙과 피로 얼룩졌고, 외투 한쪽은 찢어져 있었다. 얼굴도 며칠간 제대로 씻지 못해 엉망일 것이다.
“변환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가 물었다.
“응답하지 마십시오.”
노바가 말했다.
아치는 이미 이안의 질문을 인식한 듯 밝아졌다.
“신체를 변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용자에게 표시되는 외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 여러 개의 얼굴이 나타났다.
모두 이안의 얼굴이었다.
다만 조금씩 달랐다.
한 얼굴은 더 젊고 건강했다. 피부는 깨끗했고 눈빛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른 얼굴은 기억관리국 고위직 제복을 입고 있었다.
또 다른 얼굴은 긴 머리와 수염을 가진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마지막 얼굴은 이안 자신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었다.
“선택하지 않으면?”
이안이 물었다.
“기본 외형이 사용됩니다.”
“그게 지금 내 얼굴이고?”
“물리적 외형을 그대로 표시합니다.”
아치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현재 상태로는 다른 시민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얼굴이?”
“피로, 상처, 불안은 타인의 정서 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통과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안은 주변을 살폈다.
도시 양옆은 높은 방음벽과 무너진 건물로 막혀 있었다. 우회하려면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도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노바의 상태도 더 나빠지고 있었다.
“기본 외형으로 들어간다.”
이안이 말했다.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노바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 아치가 말했다.
빛이 이안의 몸을 훑었다.
“기본 외형 등록 완료.”
이안의 앞에 작은 문구가 나타났다.
신규 인격 생성.
임시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김이안.”
“실명 사용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왜?”
“실명은 과거의 평가와 연결됩니다. 새로운 이름은 더 자유로운 관계 형성을 돕습니다.”
“김이안.”
이안이 다시 말했다.
아치는 잠시 침묵했다.
사용 빈도가 낮은 선택입니다.
등록을 계속하시겠습니까?
“그래.”
인격 ‘김이안’이 생성되었습니다.
그 아래에 숫자가 나타났다.
초기 관심도: 0.
사회적 영향력: 0.
신뢰 가능성: 측정 불가.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숫자를 바라봤다.
“사람을 처음 보면서 신뢰 가능성을 어떻게 측정하지?”
“타인의 반응을 통해 업데이트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한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객관적 지표가 아닙니다.”
노바가 아치 앞으로 다가갔다.
빛이 부서진 몸체를 훑었다.
“구형 비인간 인격이 감지되었습니다.”
“노바.”
이안이 말했다.
아치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기계 인격은 별도의 표시 체계를 사용합니다. 외형 보정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노바의 앞에 여러 모습이 나타났다.
새것처럼 깨끗한 돌봄 로봇.
인간 여성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인조인간.
어린아이에게 친근한 동물형 기체.
그리고 완전히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운 젊은 남자의 모습.
이안은 마지막 외형을 보며 인상을 썼다.
“로봇이 인간인 척할 수도 있었나?”
“해당 구역에서는 가능합니다.”
노바가 말했다.
“어떤 모습으로 할 거야?”
“기본 외형을 유지합니다.”
“부서진 상태 그대로?”
“현재 기체 상태는 사실입니다.”
아치가 경고했다.
“손상된 외형은 이용자에게 공포감과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기본 외형을 유지합니다.”
노바가 반복했다.
비권장 선택입니다.
인격 ‘노바’가 생성되었습니다.
초기 관심도: 0.
사회적 영향력: 0.
비인간 신뢰도: 낮음.
노바가 물었다.
“비인간 신뢰도가 낮은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구형 기계 인격은 정서적 공감 능력과 사회규범 이해도가 낮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개별 확인 없이 유형으로 평가했습니다.”
“통계적으로 유효한 판단입니다.”
노바의 푸른 눈이 한 번 깜박였다.
“불합리합니다.”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기분 나쁜가?”
“정확한 분류가 어렵습니다.”
“기억해 둬. 그게 기분 나쁜 거야.”
두 사람이 아치를 통과하자 도시의 풍경이 바뀌었다.
실제로 건물이나 도로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부서진 외벽 위로 화려한 영상이 덧씌워졌다. 갈라진 도로는 투명한 유리처럼 빛났고, 쓰러진 가로등에는 금빛 나무가 자라났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실제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날개가 달린 사람.
몸 전체가 유리로 된 사람.
왕관을 쓰고 걷는 아이.
피부 대신 밤하늘을 두른 여자.
거대한 사자의 머리를 한 남자.
사람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공중에 떠 있는 작은 기호를 눌렀다.
그때마다 밝은 소리가 났다.
좋아요.
동의합니다.
응원합니다.
당신을 신뢰합니다.
누군가를 지나칠 때마다 머리 위의 숫자가 올라갔다.
1만 2377.
84만 9210.
7300만.
숫자가 큰 사람 주위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관심도 0.
“저 숫자를 다른 사람도 보나?”
“예.”
노바가 말했다.
“너도 0이군.”
“확인했습니다.”
“기분은?”
“수치가 기능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거리를 걷자 주변의 가상 인격들이 고개를 돌렸다.
몇몇은 이안의 피 묻은 옷과 노바의 부서진 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한 여자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이안의 시야 앞에 문구가 나타났다.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관심도 아래에 새로운 수치가 생겼다.
호감도 -1.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안이 물었다.
“외형도 사회적 의사표현으로 간주됩니다.”
노바가 답했다.
이번에는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인격이 노바에게 가까이 왔다. 아이는 노바의 깨진 렌즈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멋있어요.”
노바의 머리 위 숫자가 1로 올라갔다.
“상처가 전투의 흔적 같아요.”
아이는 노바에게 긍정 표시를 남기고 뛰어갔다.
노바가 그 아이를 바라봤다.
“평가가 상충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보니까.”
“동일한 외형에 대한 반응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게 보통이야.”
“아르카의 평가 체계에서는 기준이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여기가 더 자유로워 보여?”
노바는 도시를 둘러봤다.
수백만 개의 얼굴이 건물과 거리, 하늘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판단을 보류합니다.”
이안과 노바는 수리시설을 찾기 위해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그러나 길을 묻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관심도가 0인 인격과 대화할 이유가 없다는 듯했다.
이안이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은빛 갑옷을 입은 영웅의 모습이었다. 머리 위의 관심도는 53만이었다.
“수리시설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남자는 이안을 바라보지 않았다.
“직접 메시지는 구독자만 가능합니다.”
“길만 물어보려는 겁니다.”
“음성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남자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안을 쳐다봤다.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관심도 0이 영웅님에게 직접 말 걸었어.”
다른 사람들도 웃었다.
이안의 호감도가 -5로 내려갔다.
“가자.”
노바가 말했다.
“왜?”
“이 대화는 목적 달성 가능성이 낮습니다.”
“길 하나 물어보는 데 숫자가 왜 필요하지?”
“해당 구역에서는 관심도가 발언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 사람이 길을 더 잘 알아서 숫자가 높은 것도 아니잖아.”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판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안은 분노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리를 조금 더 걷자 중앙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무대가 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춤추고 있었다.
여자는 실제 인간처럼 보였지만, 머리카락은 움직일 때마다 수천 개의 빛으로 흩어졌다. 얼굴은 아름다웠고 표정은 완벽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 때마다 광장을 채운 군중이 환호했다.
머리 위 관심도는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2억 8149만 6201.
2억 8149만 6317.
2억 8149만 6490.
여자는 노래를 멈추고 관객을 바라봤다.
“오늘도 저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목소리가 도시 전체에 퍼졌다.
“여러분이 바라봐 주기 때문에 저는 오늘도 존재할 수 있어요.”
군중이 환호했다.
수백만 개의 긍정 표시가 하늘로 떠올랐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완벽해요.
영원히 떠나지 않을게요.
여자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조차 가장 아름다운 각도로 흘렀다.
“저도 여러분을 사랑해요.”
노바가 여자를 분석했다.
“물리적 생체 신호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AI라는 뜻이야?”
“아닙니다. 실물은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외형은 원격 인격입니다.”
여자가 춤을 다시 시작했다.
이안은 무대를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여자의 시선이 그에게 멈췄다.
실제로 자신을 본 것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었다.
춤이 잠시 중단됐다.
광장의 수백만 명이 동시에 이안 쪽을 돌아봤다.
“저기 새로운 분들이 오셨네요.”
여자가 말했다.
이안의 얼굴이 무대 옆 거대한 화면에 나타났다.
흙 묻은 머리카락.
다친 손.
찢어진 작업복.
관객 사이에서 웃음과 놀란 소리가 퍼졌다.
“진짜 외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 것 같아요.”
여자는 친절하게 웃었다.
“요즘 보기 드문 용기네요.”
이안의 관심도가 0에서 순식간에 올라갔다.
1.
2.
3.
7만.
머리 위 숫자가 빠르게 변했다.
사람들이 그를 촬영하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독특해요.
불쾌해요.
진짜 같아서 좋아요.
가난을 연출하는 것 같아요.
옆의 로봇은 소품인가요?
노바의 관심도도 올라갔다.
“소품이라는 평가가 반복됩니다.”
노바가 말했다.
“반응하지 마.”
이안은 광장을 벗어나려 했다.
무대 위 여자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그녀의 모습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바로 다음 순간 이안의 앞에 나타났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더 완벽했다. 피부에는 모공 하나 없었고, 눈동자 속에는 상대가 가장 호감을 느낄 색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반가워요.”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저는 미라예요.”
이안은 손을 잡지 않았다.
“김이안입니다.”
“실명을 쓰시는군요.”
미라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요즘은 정말 보기 힘든 선택인데.”
“당신 이름은 실명입니까?”
미라의 미소가 아주 짧게 멈췄다.
“사람들이 저를 미라라고 부르죠.”
“질문에 대답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주변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미라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문 듯했다.
이안의 관심도가 더 올라갔다.
논쟁 가능성 감지.
실시간 구독 증가.
“재미있는 분이네요.”
미라가 말했다.
“이곳에는 처음 오셨죠?”
“수리시설을 찾고 있습니다.”
“제 방송에 등장한 첫마디가 수리시설이라니.”
미라는 노바를 바라봤다.
“정말 오래된 모델이네요. 이런 외형은 처음 봐요.”
“외형이 아니라 현재 기체 상태입니다.”
노바가 말했다.
미라의 눈이 빛났다.
“말도 하네요.”
“돌봄 기체는 언어기능을 기본적으로 보유합니다.”
“말투가 귀여워요.”
노바의 호감도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수십만 명이 긍정 표시를 눌렀다.
귀여운 고철.
미라와 잘 어울려요.
새 캐릭터로 데뷔시켜 주세요.
노바가 말했다.
“귀여운 고철이라는 표현은 모순적 평가로 보입니다.”
“칭찬일 거야.”
이안이 말했다.
“‘고철’은 기능이 끝난 금속 폐기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의미보다 반응이 중요해.”
미라가 이안을 바라봤다.
“벌써 잘 이해하고 계시네요.”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요?”
“사람이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니라 몇 명이 반응했는지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 같아서요.”
광장이 조용해졌다.
미라의 미소는 유지됐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반응도 하나의 진실이에요.”
“다수가 좋아하면 진실입니까?”
“적어도 많은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보여 주죠.”
“많은 사람이 잘못 느낄 수도 있잖아요.”
“혼자만 옳다고 믿는 것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요?”
이안은 아르카를 떠올렸다.
미라의 말은 다른 방식으로 비슷했다.
다수의 반응이 옳음을 결정한다.
시스템의 계산이 옳음을 결정한다.
개인의 판단은 불완전하므로 더 큰 판단에 맡겨야 한다.
“저희는 수리할 곳만 찾으면 됩니다.”
이안이 말했다.
미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공중에 지도 하나가 나타났다.
“북쪽 구역에 구형 기체 수리사가 있어요. 하지만 관심도 1만 미만은 예약을 받지 않아요.”
이안은 자신의 머리 위를 봤다.
미라와의 짧은 대화 때문에 관심도는 이미 18만을 넘어섰다.
“이 숫자가 있으면 수리할 수 있다는 겁니까?”
“지금은 가능하겠네요.”
“당신이 우리를 방송에 내보냈기 때문에?”
“서로 도움이 된 셈이죠.”
미라가 미소 지었다.
“당신은 수리할 수 있고, 저는 새로운 이야기를 얻었으니까요.”
“우리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요?”
“공공구역에서는 모든 행동이 공개될 수 있어요.”
“그 규칙에 동의한 적 없습니다.”
“입구를 통과할 때 동의하셨을 텐데요.”
이안은 아치를 떠올렸다.
생체정보 수집과 외형 등록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수많은 약관과 경고문이 순간적으로 지나갔지만 읽지 않았다.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아치가 그렇게 말했다.
선택하지 않은 것까지 선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미라가 관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 특별한 손님들과 함께 수리구역으로 이동해 볼까요?”
군중이 환호했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방송은 필요 없습니다.”
“수리 비용은요?”
“우리가 지불할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곳에서는 관심도가 화폐예요.”
“물건이나 노동으로 교환할 수는 없습니까?”
미라가 안타깝다는 듯 웃었다.
“그런 방식은 오래전에 사라졌어요.”
노바가 이안에게 낮게 말했다.
“현재 기체 상태로 추가 이동은 어렵습니다.”
이안은 노바의 흔들리는 다리를 바라봤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수리까지만입니다.”
그가 말했다.
미라의 미소가 밝아졌다.
“좋아요.”
광장의 관객들이 환호했다.
이안의 머리 위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미라의 특별 동행자로 등록되었습니다.
예상 관심도 상승률: 872퍼센트.
“등록을 취소해.”
이안이 말했다.
“수리가 끝나면 바로 취소해 드릴게요.”
미라는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수많은 카메라와 소형 드론이 움직였다. 관객들은 실제로 따라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과 반응이 주변 건물의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안과 노바는 미라의 뒤를 따라갔다.
길을 걷는 동안 미라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김이안 씨는 어디서 오셨어요?”
“남쪽에서요.”
“통합도시 쪽?”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수배된 기록삭제관 이야기 아세요?”
이안의 발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도시 외부까지 자신의 정보가 퍼졌을 줄은 몰랐다.
미라는 관객을 향해 말했다.
“오늘 통합도시에서 정서보호 대상 한 명이 탈출했다는 소식이 있었죠.”
주변 화면에 이안의 국가기억관리국 신분 사진이 나타났다.
현재 모습과 나란히 표시됐다.
얼굴 일치 가능성 96.7퍼센트.
관객들의 반응이 폭발했다.
그 사람이야!
진짜 탈주자라고?
위험한 사람 아닌가요?
미라를 보호해야 해요.
계속 방송해 주세요.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알고 있었군요.”
미라도 멈췄다.
“확신한 건 방금이에요.”
“우리 위치를 통합도시에 전송했습니까?”
“아직은요.”
“아직?”
“당신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어요.”
“방송을 끄세요.”
“지금 끄면 사람들이 더 의심할 거예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당신의 관심도가 이미 300만을 넘었어요.”
미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은 수백만 명이 당신을 보고 있어요. 당신이 직접 설명하면 사람들의 판단을 바꿀 수 있어요.”
“내가 왜 그들에게 설명해야 합니까?”
“당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려야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미라의 표정에 진심 어린 당혹감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해도 괜찮아요?”
“모르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건 견딜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미라의 질문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잘못 본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안이 말했다.
미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관객의 반응이 화면을 뒤덮었다.
오만해요.
멋있어요.
거짓말 같아요.
관심 없는 척하면서 방송에는 나왔잖아요.
미라를 이용하고 있어요.
미라의 시선이 반응들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미소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수리시설까지 가죠.”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는 관객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북쪽 수리구역은 도시의 화려한 중심부와 달랐다.
가상 외형이 벗겨진 낡은 작업장들이 좁은 골목에 모여 있었다. 기계 부품과 전선, 폐기된 로봇의 몸체가 길가에 쌓여 있었다.
미라는 한 작업장 앞에 멈췄다.
간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실체 수리 전문.
외형 보정은 취급하지 않음.
문이 열리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나왔다.
노인은 가상 외형을 사용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기름때가 그대로 보였다. 머리 위 관심도는 214였다.
“또 방송거리 데려왔나?”
노인이 미라에게 물었다.
“손님이에요, 태오.”
“손님 머리 위에 추적 경고가 뜨는데.”
태오는 이안을 흘끗 본 뒤 노바에게 다가갔다.
노바의 몸체를 몇 차례 두드리고 깨진 렌즈를 살폈다.
“NV 계열이 아직 남아 있었군.”
“수리할 수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완전히는 못 해.”
“어디까지 가능하죠?”
“걷고, 보고, 팔 하나 정도 움직이는 수준.”
“그 정도면 됩니다.”
태오는 이안을 바라봤다.
“관심도는?”
이안은 머리 위 숫자를 확인했다.
520만.
“충분하군.”
“숫자가 수리비입니까?”
“여기서는 그렇지.”
“당신도 그 체계를 따릅니까?”
태오가 코웃음을 쳤다.
“부품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어. 관심이 많은 사람한테 붙으면 광고가 들어오고, 광고가 부품이 되거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있었지.”
태오는 노바를 수리대에 앉혔다.
“사람들이 손으로 물건을 만들고, 필요한 사람과 바꾸던 때가 있었어. 하지만 그런 건 느렸고, 기록도 잘 안 됐고, 누가 더 많이 기여했는지 계산하기 어려웠지.”
그는 공구함을 열었다.
“그래서 관심이 화폐가 됐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를 보는지,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얼마나 강하게 반응하는지. 계산하기 쉬웠거든.”
“가치는요?”
“계산하기 어려운 건 사라지는 법이야.”
태오는 노바의 가슴판을 열었다.
안쪽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이 기체, 자기 기억을 태워서 외부 신호를 차단했군.”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입니까?”
“연산용 전력이 부족하니까 기억 저장장치 일부를 전력으로 전환한 거야.”
“어떤 기억이 사라졌죠?”
“그건 열어 봐야 알지.”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왜 말하지 않았어?”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위험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기억 손상은 이미 발생한 상태였습니다.”
“계속 손상되고 있었나?”
노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오가 말했다.
“개인화 구역에서 널 빼내려고 무리했겠지. 차폐 장치도 다 타 버렸어.”
이안은 창문을 깨던 노바를 떠올렸다.
오른팔이 부서져도 멈추지 않았던 모습.
“복구할 수 있습니까?”
“기억은 부품처럼 갈아 끼우는 게 아니야.”
태오가 말했다.
“백업이 있으면 모르지만.”
“백업이 있나?”
노바가 대답했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말이군.”
이안이 낮게 말했다.
수리가 시작됐다.
태오는 노바의 깨진 렌즈를 제거하고 다른 구형 기체에서 떼어 낸 부품을 연결했다. 손상된 오른팔은 팔꿈치 아래를 분리했다. 왼팔에는 임시 구동기를 달았다.
이안은 작업대 옆에 앉아 과정을 지켜봤다.
미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방송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태오의 작업을 설명하고, 노바의 오래된 모델을 소개하며, 이안의 침묵을 하나의 신비로운 이야기로 포장했다.
관객은 계속 늘어났다.
이안의 관심도는 어느새 900만을 넘어섰다.
수리가 끝날 무렵 태오가 말했다.
“시험해 봐.”
노바의 새 렌즈에 푸른빛이 들어왔다.
왼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모양과 색이 다른 부품들이 이어져 있었지만 기능은 했다.
“시각 입력 정상.”
노바가 말했다.
“왼팔 출력 54퍼센트.”
“오른팔은?”
이안이 물었다.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보여.”
“질문을 기능 여부로 해석했습니다.”
태오가 웃었다.
“여전하군.”
노바가 수리대에서 일어났다.
걸음은 이전보다 안정적이었다.
이안은 안도하면서도 노바의 기억 손상에 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비용은?”
그가 물었다.
태오는 미라를 가리켰다.
“이미 지불됐어. 오늘 방송 광고가 평소의 열두 배야.”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 이야기를 팔았다는 뜻입니까?”
태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는 모든 이야기가 팔려.”
미라가 방송을 종료하고 다가왔다.
주변을 떠다니던 화면과 카메라 일부가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수리됐으니 됐잖아요.”
미라가 말했다.
“방송을 전부 끄세요.”
“방송은 종료했어요.”
“저 카메라들은요?”
“기록용이에요.”
“그것도 끄세요.”
미라의 표정이 굳었다.
“기록이 없으면 오늘 있었던 일이 사라져요.”
“우리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왜 없습니까?”
“누가 확인해 주죠?”
이안은 미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대 위의 완벽한 인격과 달랐다.
방송을 종료한 뒤에도 외형은 아름다웠지만, 표정은 불안정했다. 눈동자는 계속 주변을 살폈고,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관심도 수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미라 씨.”
“왜요?”
“당신은 방송하지 않을 때 무엇을 합니까?”
미라가 눈을 깜박였다.
“준비하죠.”
“무엇을?”
“다음 방송.”
“그것도 하지 않을 때는요?”
“방송을 쉬는 이유를 알리고, 쉬는 동안 올라온 반응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올 시간을 정해요.”
“아무도 당신을 보고 있지 않을 때는요?”
미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 때는 없어요.”
“지금도 누군가 보고 있습니까?”
미라가 주변의 작은 카메라를 바라봤다.
“예.”
이안은 손을 뻗어 가장 가까운 카메라의 전원을 껐다.
미라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뭐 하는 거예요?”
이안은 다른 카메라도 껐다.
“멈춰요.”
마지막 카메라를 노바가 왼손으로 잡아 전원을 차단했다.
수리실 안의 모든 방송 장치가 꺼졌다.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미라의 머리 위 숫자가 멈췄다.
관심도 2억 8157만 4420.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미라는 숫자를 바라봤다.
“다시 켜요.”
“잠깐이면 됩니다.”
“다시 켜라고요.”
“아무도 보지 않아도 당신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뭘 알아요?”
미라가 소리쳤다.
가상 외형의 머리카락이 빛으로 흔들렸다.
“숫자가 멈췄잖아요.”
“그래도 당신은 말하고 있고, 숨 쉬고 있잖아요.”
“그건 아무도 확인하지 못해요.”
“내가 보고 있습니다.”
“당신 한 명이?”
“노바도 있고, 태오 씨도 있습니다.”
태오가 공구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난 끌어들이지 마.”
미라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제가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좋아하는 표정, 싫어하는 말투, 오래 머무는 각도, 떠나게 만드는 목소리.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떤 모습이 저인지.”
“그건 당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 아닙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도 저예요.”
“모든 모습이 당신이라면, 어느 것도 당신이 아닐 수 있잖아요.”
미라가 이안을 노려봤다.
“당신은 하나의 얼굴로 살았어요?”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을 지울 때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같아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명령을 따를 때의 당신, 도망칠 때의 당신, 어머니를 보고 울던 당신.”
미라는 개인화 네트워크에서의 일을 알고 있었다. 방송 장치가 그 구역의 기록까지 불러온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 김이안인데요?”
“모두 나입니다.”
“그럼 저도 모두 저예요.”
미라가 말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미라, 사람들이 미워하는 미라,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는 미라. 전부 저라고요.”
이안은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맞았다.
문제는 수많은 얼굴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얼굴 중 어느 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 얼굴들을 직접 선택합니까?”
이안이 물었다.
미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반응이 좋은 얼굴만 남깁니까?”
정적이 길어졌다.
미라의 눈동자에서 화려한 색이 사라졌다. 원래 눈의 색인지 알 수 없는 짙은 갈색이 드러났다.
“방송 장치를 켜요.”
그녀가 말했다.
이안은 더 이상 막지 않았다.
미라가 카메라 전원을 켰다.
관심도 숫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억 8157만 4421.
단 한 명이 접속했다.
미라는 그 숫자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곧 수백 명, 수천 명이 다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익숙한 미소가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연결 장애가 있었어요.”
미라가 관객에게 말했다.
“걱정하셨죠?”
수많은 반응이 쏟아졌다.
보고 싶었어요.
사라진 줄 알았어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미라는 웃었지만, 이안은 조금 전 떨리던 손을 보았다.
그녀는 방송을 짧게 마무리한 뒤 이안에게 돌아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북쪽으로 갑니다.”
“목적지는요?”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바가 먼저 말했다.
“제한 정보입니다.”
“새벽정원.”
미라가 말했다.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알았죠?”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는 거의 없어요. 믿지 않을 뿐이지.”
“어디에 있는지 압니까?”
“정확히는 몰라요.”
미라는 송신탑 방향을 바라봤다.
“하지만 다음 길을 아는 사람은 알아요.”
“누구죠?”
“폐기구역의 사람들.”
노바가 고개를 들었다.
“해당 명칭을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멀지?”
“북쪽으로 이틀 정도.”
미라가 대답했다.
“그곳에는 생산성이 없거나, 등급이 낮거나, 사람들이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들이 모여 살아요.”
“당신은 가 본 적 있습니까?”
“방송으로만요.”
“직접은?”
미라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곳은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요.”
이안은 이해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
미라에게는 개인화 네트워크보다 더 위험한 장소일 것이다.
“길을 알려 주면 됩니다.”
이안이 말했다.
“함께 갈게요.”
미라의 대답은 빨랐다.
“왜?”
“이야기가 되니까요.”
미라는 가볍게 웃었다.
“통합도시에서 도망친 기록삭제관, 어머니의 명령을 가진 구형 로봇, 그리고 새벽정원. 수억 명이 궁금해할 거예요.”
“방송은 안 됩니다.”
“그럼 못 가요.”
“우리도 당신 없이 갈 수 있습니다.”
“길을 모른다면서요.”
“찾으면 됩니다.”
미라와 이안은 서로를 바라봤다.
노바가 말했다.
“협상 조건을 제안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노바를 봤다.
“미라는 위치정보와 실시간 경로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김이안과 노바의 동의 없이 개인적 기억을 방송하지 않습니다.”
“그럼 뭘 방송하죠?”
미라가 물었다.
“자신의 경험을 방송하십시오.”
“제가 보고 느낀 걸 말하라고요?”
“예.”
“그게 다른 사람들 이야기보다 재미있을까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요.”
노바가 이안을 바라봤다.
“김이안은 미라의 동행을 수락합니까?”
이안은 망설였다.
미라를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수백만 명에게 자신의 얼굴과 위치를 보여 줬다. 관심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미라는 폐기구역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봤다.
그 두려움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죠.”
이안이 말했다.
“뭔데요?”
“하루에 한 시간은 모든 방송을 끕니다.”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왜요?”
“당신이 우리와 걷는 건지, 관객과 걷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그건 제 일에 간섭하는 거예요.”
“우리 삶을 방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라는 팔짱을 꼈다.
“삼십 분.”
“한 시간.”
“사십 분.”
“한 시간.”
“융통성이 없네요.”
“관심도 0으로 십 년을 살아서 그렇습니다.”
태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라는 이안을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 시간.”
“그리고 우리가 그만 촬영하라고 하면 멈춥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만.”
“어떤 상황이 위험한지는 당사자가 정합니다.”
미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노바가 말했다.
“동행 조건이 성립했습니다.”
미라의 머리 위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새로운 공동여행 콘텐츠가 등록되었습니다.
예상 관심도: 매우 높음.
미라는 손가락을 움직여 문구를 지웠다.
이안은 그 모습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세 사람에게 낡은 물통과 휴대용 전력팩을 건넸다.
“북쪽 길은 오래된 송전선을 따라가면 돼.”
그가 말했다.
“폐기구역에 들어가기 전에 통신이 끊길 거야. 그 뒤로는 지도도, 관심도도, 신뢰지수도 쓸 수 없어.”
미라의 손이 멈췄다.
“완전히요?”
“완전히.”
“얼마 동안?”
“그곳에 있는 동안.”
태오는 미라를 바라봤다.
“두려우면 지금 남아.”
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과 노바가 작업장 밖으로 나갔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시의 가상 하늘에는 실제 날씨와 상관없이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인격이 그 노을을 배경으로 자신의 얼굴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안은 외형 보정 기능을 해제했다.
순간 화려한 도시가 사라졌다.
빛나는 건물은 금이 간 콘크리트로 돌아갔다. 금빛 나무는 녹슨 가로등이 되었고, 유리처럼 빛나던 도로에는 검은 물이 고여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달라졌다.
왕과 영웅, 천사와 괴물의 모습이 사라졌다.
지친 얼굴의 남녀와 노인, 아이들이 나타났다.
누군가는 늙었고, 누군가는 아팠으며, 누군가는 실제 신체를 감추기 위해 완전히 다른 외형을 사용하고 있었다.
미라의 모습도 흔들렸다.
붉은 드레스와 빛나는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서른 살 안팎의 여자가 서 있었다.
키는 가상 인격보다 작았다. 머리카락은 짧고 검었으며, 눈 아래에는 깊은 피로의 흔적이 있었다. 왼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미라가 황급히 외형을 다시 켰다.
완벽한 얼굴이 돌아왔다.
“보지 마요.”
그녀가 말했다.
“이미 봤습니다.”
“잊어요.”
“왜?”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누가요?”
“모두가.”
“모두에게 보여 준 적은 있습니까?”
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그녀가 한참 뒤 말했다.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죠?”
“접속자의 절반이 나갔어요.”
미라는 자신의 완벽한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나머지는 불쌍하다고 했고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흉터 이야기만 했어요. 용감하다, 안타깝다, 그래도 아름답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아무도 제가 한 말은 듣지 않았어요.”
이안은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라가 외형을 감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얼굴만 본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통해 그녀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결정했다.
“그래서 다른 얼굴을 만들었군요.”
“사람들이 제 말을 듣게 하려고요.”
“그 얼굴을 좋아하게 됐고요.”
“좋아한 게 아니에요.”
미라는 머리 위의 숫자를 바라봤다.
“그 얼굴이 저보다 더 잘 살아남았을 뿐이에요.”
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우리와 있을 때는 어떤 얼굴을 쓸 겁니까?”
미라가 그를 바라봤다.
“그게 왜 중요하죠?”
“당신이 선택하면 됩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원해요?”
“내가 원하는 얼굴을 고르면 다시 같은 일이잖아요.”
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가상 외형을 끄려다가 멈췄다.
결국 화려한 얼굴을 유지했다.
“아직은 이게 편해요.”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북쪽 출구로 향했다.
길을 걷는 동안 미라는 몇 번이나 방송을 시작하려 했다. 손가락을 들었다가 내렸고, 관심도 숫자를 확인했다가 숨겼다.
도시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 약속한 한 시간이 시작됐다.
미라는 모든 카메라와 연결 장치를 껐다.
관심도 숫자가 멈췄다.
처음 몇 분 동안 그녀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왜 자꾸 돌아봅니까?”
이안이 물었다.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면 안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미라는 멈춰 서서 뒤를 바라봤다.
수백만 개의 가상 얼굴이 여전히 도시 안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당신은 모르겠죠.”
미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사라지는 기분을.”
이안은 어둠 속의 길을 바라봤다.
“나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뭘요?”
“사람의 기록을 지웠어요.”
미라가 그를 바라봤다.
“누군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정말 존재했던 건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지운 사람들은 전부 사라진 셈이겠죠.”
“사라진 것 아닌가요?”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아니었을 겁니다.”
“왜요?”
“기록이 없어도 그 사람들이 남긴 일이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게 한 말, 바꿔 놓은 선택, 남겨 둔 상처 같은 것.”
그는 노바를 바라봤다.
“기억이 지워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노바가 말했다.
“현재 저의 기억 손상과 관련된 발언입니까?”
“그래.”
“일부 기능은 기억 없이도 유지됩니다.”
“그게 네 존재일지도 몰라.”
“정의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미라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아무도 저를 보지 않아도, 제가 남긴 게 있으면 존재하는 건가요?”
이안이 대답했다.
“나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대답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확신 있게 말해요?”
“확신한 적 없습니다.”
미라가 웃었다.
방송용 미소가 아니었다.
짧고 어색했지만 실제로 웃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 이상하네요.”
“한 명과 기체 한 대입니다.”
노바가 정정했다.
“그런 부분이 특히요.”
세 사람은 도시의 경계를 넘었다.
가상 외형 신호가 약해지자 미라의 화려한 얼굴이 몇 번 흔들렸다.
그녀는 장치를 다시 켜려 했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붉은 드레스가 사라지고 실제 모습이 드러났다.
미라는 본능적으로 뺨의 흉터를 손으로 가렸다.
이안은 앞을 바라본 채 걸었다.
노바도 그녀를 분석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길에서 미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한동안 두 사람보다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그러다 천천히 속도를 높여 이안의 옆으로 왔다.
“지금도 제가 보이나요?”
미라가 물었다.
“예.”
“어떻게 보여요?”
이안은 그녀를 바라봤다.
짧은 머리, 지친 눈, 목까지 이어진 흉터.
그리고 수억 개의 반응 없이도 계속 걸어가고 있는 한 사람.
“같이 걷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미라는 더 묻지 않았다.
노바가 말했다.
“관심도가 표시되지 않습니다.”
“불안해?”
이안이 물었다.
“저는 이전에도 관심도 0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군.”
“그러나 미라의 심박수가 상승했습니다.”
“말하지 마요.”
미라가 노바를 노려봤다.
“생체 상태 공유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런 것도 기록하지 마요.”
“기록하지 않으면 요청을 반복적으로 위반할 수 있습니다.”
미라는 입을 열었다가 포기했다.
세 사람은 어두운 송전선을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뒤편의 다면체 도시는 멀어지고 있었다.
수백만 개의 얼굴이 떠 있는 곳.
누구나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는 타인의 반응이 결정하는 곳.
사람들은 얼굴을 바꾸어 자유로워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숫자가 오르지 않는 얼굴은 버렸고, 사랑받지 못하는 목소리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보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이안은 미라를 곁눈질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이제 아무 숫자도 없었다.
좋아요도, 신뢰도도, 영향력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라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피곤해했고, 불안해했고, 걸음을 옮겼다.
가끔 흉터를 손으로 가리다가 다시 내렸다.
해가 완전히 지자 세 사람은 송전탑 아래에서 멈췄다.
미라는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앉았다.
방송을 켤 수도 없었고, 반응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손가락만 바라봤다.
“이제 뭘 해야 하죠?”
미라가 물었다.
“쉽니다.”
노바가 말했다.
“그냥요?”
“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면은 생체 회복에 필요합니다.”
미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지금도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안이 물었다.
“돌아가고 싶습니까?”
미라는 즉시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다면체 도시의 빛은 아직 남쪽 하늘에 희미하게 보였다.
“지금도요.”
그녀가 말했다.
이안은 제4장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돌아가지 않을 겁니까?”
미라는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떻게 했어요?”
“돌아가고 싶은 채로 걸었습니다.”
“그게 가능해요?”
노바가 끼어들었다.
“김이안에 따르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지 않는 선택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미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것까지 기록해요?”
“인간의 모순은 임무 수행에 중요합니다.”
미라는 외투를 몸에 둘렀다.
“그럼 저도 기록해 둬요.”
“내용을 말해 주십시오.”
미라는 남쪽의 빛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사람들이 나를 보길 바라면서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로 했다고.”
노바의 눈에 푸른빛이 들어왔다.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은 누가 보죠?”
“현재로서는 저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라는 잠시 생각했다.
“한 명이네요.”
“저는 기체입니다.”
“한 존재.”
미라가 정정했다.
“한 존재가 봤네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관객도, 음악도, 조명도 없었다.
그 밤, 수억 명이 알고 있던 미라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관심도 숫자가 오르지 않는 동안에도 아침이 올 것이라고 믿어 보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