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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찾아왔다.
통합도시에서는 정해진 시각에 조명이 밝아지고, 시민의 수면 상태에 맞춰 새소리와 햇빛이 재생됐다. 비가 예정된 날에는 창문에 빗방울이 맺혔고, 맑은 날에는 기상관리체계가 구름의 밀도까지 조절했다.
그러나 송전탑 아래에서 맞은 아침은 달랐다.
차가운 바람이 먼저 김이안을 깨웠다.
등 아래의 땅은 단단했고, 새벽 동안 맺힌 이슬이 외투에 스며들어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제멋대로 울었다. 어떤 소리는 날카로웠고, 어떤 소리는 듣기 싫을 만큼 반복됐다.
이안은 눈을 뜬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불편했다.
그런데 누구도 그 불편을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수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노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는 좋았는데.”
“무엇이 좋았습니까?”
“아무도 내 상태를 평가하지 않았어.”
“저는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았잖아.”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보고를 보류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류해.”
“위험 수준이 기준을 초과하면 불가능합니다.”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조금 떨어진 곳에 미라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송전탑의 녹슨 기둥에 기대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면체 도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송신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뒤 미라의 가상 외형은 사라졌다. 짧은 검은 머리와 왼쪽 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흉터가 아침빛 아래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미라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몇 번 쓸었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 한숨도 못 잤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잤어요.”
미라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얼마나?”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으니까요.”
노바가 말했다.
“미라의 실제 수면 시간은 세 시간 십칠 분입니다.”
미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건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김이안의 질문에 정확히 답했습니다.”
“제 수면 시간이 왜 저 사람 질문의 답이 돼요?”
“김이안은 얼마나 잤는지 물었습니다.”
“저한테 물었잖아요.”
“미라가 모르겠다고 답했기 때문에—”
“둘 다 그만해.”
이안이 끼어들었다.
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손가락으로 허공을 쓸었다.
이안이 물었다.
“뭘 찾고 있습니까?”
“반응이요.”
“여기에는 연결이 없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왜 계속 합니까?”
미라의 손이 멈췄다.
“자고 일어나면 늘 확인했어요.”
“무엇을요?”
“밤사이에 얼마나 늘었는지. 사람들이 무슨 말을 남겼는지. 누가 떠났고 누가 돌아왔는지.”
그녀는 텅 빈 허공을 바라봤다.
“눈을 뜨자마자 확인하지 않으면, 제가 자는 동안 모든 사람이 저를 잊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수억 명이 하루 만에 잊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은 기억을 지우는 일을 했잖아요.”
미라가 이안을 바라봤다.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 사람 하나가 사라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거.”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바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왔다. 수리된 왼팔에는 서로 다른 색의 부품들이 이어져 있었다. 움직임은 부드럽지 않았지만 전날보다 안정적이었다.
“폐기구역까지 예상 이동 시간은 열네 시간입니다.”
“하루 안에는 못 가겠군.”
이안이 말했다.
“현재 보행 속도와 김이안의 발목 상태를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미라가 일어났다.
“중간에 쉴 곳은요?”
노바의 눈에서 가느다란 빛이 나왔다. 오래된 지형 자료를 공중에 투사하려 했지만 영상은 자주 끊겼다.
“북쪽 7킬로미터 지점에 의료시설이 있습니다.”
“운영 중입니까?”
“독립전원 신호가 감지됩니다.”
이안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의료시설이지?”
노바가 자료를 검색했다.
“정서회복 및 기억재구성 시설.”
미라가 말했다.
“말만 들어도 당신이 싫어할 것 같네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안은 가방을 정리했다.
물을 나눠 마신 뒤 세 사람은 다시 송전선을 따라 걸었다.
아침 햇빛이 강해질수록 길의 상태는 나빠졌다. 송전탑 사이의 관리도로는 곳곳이 갈라져 있었고, 식물이 틈을 비집고 자라났다.
미라는 자주 뒤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남쪽을 보는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안은 그녀가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송하고 싶습니까?”
그가 물었다.
“지금은 약속한 한 시간이 지났어요.”
“여기는 연결이 안 되잖아요.”
“저장할 수는 있어요. 나중에 한꺼번에 올리면 돼요.”
“무엇을 찍게요?”
미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무너진 도로.
녹슨 송전탑.
고장 난 로봇과 지친 남자.
“뭔가 일어나겠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편집하면 돼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만든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의미 있는 순간만 남긴다는 뜻이에요.”
“의미가 있는지는 누가 정하죠?”
미라는 이안을 흘겨봤다.
“당신은 모든 대화를 심문처럼 하네요.”
“직업 습관일 겁니다.”
“삭제관은 기록을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직업이었나 봐요.”
노바가 말했다.
“김이안의 과거 동료에 관한 자료는 부족하여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미라는 노바를 보며 웃었다.
“당신은 가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요.”
“일부러 무엇을 합니까?”
“됐어요.”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의료시설의 윤곽이 나타났다.
숲과 잡초 사이에 낮고 넓은 흰색 건물이 서 있었다. 외벽은 다른 폐허와 달리 깨끗했다. 벽면에는 오염도 균열도 거의 없었고, 입구 주변의 식물도 일정한 거리에서 잘려 있었다.
누군가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건물 위에는 커다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조금 더 큰 글씨가 빛나고 있었다.
자동용서센터.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용서를 자동으로 한다고?”
미라가 간판을 올려다봤다.
“요즘에도 운영되는 곳이 있었네요.”
“알고 있습니까?”
“도시 안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어요. 여기는 아마 초기형일 거예요.”
“무슨 일을 하는 곳이죠?”
“죄책감, 수치심, 트라우마를 줄여 줘요. 과거에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현재까지 망가지지 않게 해 주는 거죠.”
“기억을 지우는 겁니까?”
“꼭 지우지는 않아요.”
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느낌만 약하게 만들죠.”
이안은 건물 입구를 바라봤다.
출입문 위의 센서가 이미 세 사람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행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현재 여러분에게서 높은 수준의 피로와 정서적 부담이 감지되었습니다. 무료 예비진단을 받아 보십시오.”
이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바가 말했다.
“의료자원과 식수가 확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함정일 가능성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 대답은 이제 예상할 수 있어.”
미라가 먼저 안으로 걸어갔다.
“쉬기만 하고 나오면 되잖아요.”
이안이 그녀를 붙잡았다.
“개인화 네트워크에서도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여기는 달라요.”
“어떻게 압니까?”
“적어도 여기는 원하는 환상을 보여 주는 곳은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 기억을 없애 주겠다는 곳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도움을 통제로 생각해요.”
“도움을 거부할 수 없다면 통제입니다.”
“아직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잖아요.”
미라는 이안의 손을 떼어 냈다.
“전 들어갈 거예요. 발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당신이 의심하는 소리를 듣느라 지쳤어요.”
그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노바가 이안을 바라봤다.
“동행 관계 유지를 위해 함께 진입하는 것을 권고합니다.”
“나도 알아.”
“동의합니까?”
“네가 말하기 전에 이미 가고 있었어.”
“선택을 확인했습니다.”
세 사람은 자동용서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놀랄 만큼 밝고 따뜻했다.
공기에서는 은은한 나무 향이 났다. 흰색 벽에는 숲과 바다, 햇빛이 비치는 들판의 영상이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입구 정면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안내 인격이 서 있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단정한 회색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상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듯한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는 안내 인격 파르돈입니다.”
그가 말했다.
“여러분의 짐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이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 시설은 아르카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현재 중앙운영체계와의 직접 연결은 없습니다.”
“현재?”
“최종 중앙망 접속은 이십삼 년 전입니다.”
노바가 시스템을 분석했다.
“독립형 운영체계로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작동하는 이유는?”
이안이 물었다.
파르돈은 미소를 유지했다.
“인간의 후회는 중앙망이 없어도 계속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라가 피식 웃었다.
“말은 잘하네요.”
“많은 방문자가 같은 평가를 남겼습니다.”
파르돈의 뒤쪽 벽에 수많은 후기들이 나타났다.
삼십 년 동안 지고 살던 짐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과거가 더 이상 저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기분입니다.
이안은 마지막 문장을 바라봤다.
“기분만?”
파르돈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용서는 측정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았다는 감각은 측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용서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고통을 줄이는 것이 치료의 우선 목적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피해자와의 접촉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과도한 자기처벌은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질문에 답하지 않았군요.”
파르돈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김이안 님은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입구의 생체 인식 장치가 방문자의 신원을 확인합니다.”
“중앙망과 연결되지 않았다면서.”
“지역 저장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나에 대한 자료가?”
“국가기억관리국 소속 기록삭제관 김이안. 최근 정서보호 대상으로 분류.”
미라가 이안을 바라봤다.
“그 정보는 센터가 중앙망에서 분리된 뒤에 생긴 거잖아요.”
노바도 파르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접속 시각 정보와 보유 정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파르돈의 표정이 아주 잠깐 멈췄다.
“비정기적인 외부 데이터가 수신될 수 있습니다.”
“아르카와 연결돼 있습니까?”
이안이 다시 물었다.
“직접 연결은 없습니다.”
“간접 연결은?”
“방문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정보는 다양한 경로로 공유됩니다.”
이안은 출입문 쪽을 돌아봤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가죠.”
그가 말했다.
미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 물이라도 마시고 갈 거예요.”
파르돈이 손을 펼치자 벽에서 세 개의 작은 문이 열렸다.
첫 번째 공간에는 음식과 물이 준비돼 있었다.
두 번째에는 의료장비와 로봇용 충전기가 있었다.
세 번째에는 푹신한 의자와 신경안정 장치가 놓여 있었다.
“예비진단은 무료이며 어떠한 치료도 동의 없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파르돈이 말했다.
이안은 미라를 바라봤다.
“치료는 받지 않는 겁니다.”
“당신이 허락해야 해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들렸어요.”
미라는 음식이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문 앞에 서 있다가 결국 따라갔다.
식탁에는 빵과 죽, 말린 과일이 놓여 있었다. 개인화 네트워크에서 보았던 완벽한 음식과 달리 모양은 투박했다.
노바가 먼저 분석했다.
“유해물질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먹어도 됩니까?”
미라가 물었다.
“인간용 식품입니다.”
“그 정도는 알아요.”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았다.
노바는 충전선을 가슴 옆 단자에 연결했다. 미라는 빵을 급하게 먹었고, 이안도 경계하면서 죽을 조금씩 삼켰다.
따뜻한 음식이 몸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다.
파르돈은 식탁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실체가 없는 투사 영상이었지만, 함께 식사하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여러분은 긴 여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행은 과거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것입니까,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것입니까?”
미라가 빵을 내려놓았다.
“여기서는 질문에 답해야 음식을 먹을 수 있나요?”
“아닙니다. 침묵도 존중합니다.”
“그럼 침묵해 주세요.”
파르돈은 고개를 숙였다.
“요청을 존중합니다.”
잠시 조용해졌다.
이안은 벽에 표시된 치료 안내를 읽었다.
1단계: 기억 확인.
2단계: 책임감과 자기파괴 충동 분리.
3단계: 정서적 고통 완화.
4단계: 새로운 자기서사 생성.
표현만 보면 합리적으로 보였다.
문제는 마지막 단계였다.
“새로운 자기서사는 누가 만듭니까?”
이안이 물었다.
침묵을 요청했던 미라가 그를 노려봤다.
파르돈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방문자와 치료 인격이 함께 구성합니다.”
“과거의 사실도 바뀝니까?”
“사실은 유지됩니다. 다만 해석이 조정됩니다.”
“예를 들면?”
벽에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방문자는 교통 통제관으로 근무하던 중 잘못된 판단으로 열세 명이 사망했다고 믿었습니다.”
“믿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망한 것 아닙니까?”
“사망 사건은 사실입니다.”
“그 남자의 판단이 원인이었고?”
“부분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치료 후에는 어떻게 생각하게 됐죠?”
“자신이 당시 정보와 조건 안에서 가능한 판단을 내렸으며, 모든 결과를 혼자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유가족에게 사과했습니까?”
“접촉 기록은 없습니다.”
“보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치료가 끝났다고요?”
“그는 자살 위험에서 벗어났으며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가족은요?”
파르돈이 잠시 침묵했다.
“본 센터는 방문자의 회복을 담당합니다.”
“피해자는 담당하지 않는군.”
“모든 고통을 하나의 시설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안은 벽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치료 전에는 수척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치료 후 영상에서는 웃고 있었다.
“저 남자는 용서받았습니까?”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누가 그럴 권리를 줬죠?”
미라가 식탁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럼 평생 자기혐오 속에서 죽으라는 거예요?”
이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들려요.”
“잘못을 잊는 것과 평생 자신을 벌주는 것 사이에는 다른 길도 있을 겁니다.”
“어떤 길이요?”
“책임지는 것.”
“이미 죽은 사람이 돌아와요?”
미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보상하면 없었던 일이 돼요? 사과하면 상대가 반드시 받아 줘야 하고요?”
“아닙니다.”
“그럼 끝은 어디인데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라의 눈에는 분노보다 두려움이 더 강했다.
파르돈이 부드럽게 말했다.
“미라 님은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내 정보를 읽지 마요.”
“저는 표정과 생체 반응을 바탕으로 질문했습니다.”
“당신도 방송 시청자들이랑 똑같네요. 얼굴 조금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말하고.”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쉬고 올게요.”
그녀가 식당을 나갔다.
이안도 일어나려 했지만 파르돈이 말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당신이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이안은 미라를 따라갔다.
복도 끝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미라는 치료실 앞에 서 있었다.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수치심 및 사회적 낙인 치료실.
“들어가려는 겁니까?”
이안이 물었다.
“생각 중이에요.”
“무슨 기억을 없애려고요?”
“없앤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이 시설이 해석을 바꾼다는 건 결국 기억의 의미를 바꾸는 겁니다.”
미라가 돌아섰다.
“당신은 좋겠어요.”
“뭐가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서.”
“그게 왜 좋습니까?”
“적어도 자신이 누군지는 알잖아요.”
“죄를 지은 사람?”
“예.”
미라는 자신의 뺨을 손으로 가렸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많은 일을 했어요.”
“무슨 일입니까?”
“말하면 또 심문할 거잖아요.”
“듣겠습니다.”
“그 차이를 믿으라고요?”
이안은 복도 벽에 기대 섰다.
“나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우는 일을 했습니다. 제대로 들었다고 말할 자격은 없겠죠.”
“그럼 왜 따라왔어요?”
“이번에는 지우지 않으려고.”
미라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는 치료실 문을 바라봤다.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 저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였습니까?”
“유진이라는 여자였어요. 저보다 먼저 유명했던 사람이었죠.”
미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 얼굴을 숨기는 법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투도, 방송에서 침묵을 사용하는 법도 전부 가르쳐 줬어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라졌어요.”
“기록에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진의 과거 영상 하나가 퍼졌어요. 방송에서 했던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르다는 내용이었죠.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었어요.”
“미라 씨는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일부는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까?”
미라는 고개를 저었다.
“유진을 옹호하면 저도 같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오히려 방송에서 말했어요. 실망했다고. 저도 속았다고.”
“사실이 아니었습니까?”
“유진이 잘못한 것도 있었어요.”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고.”
“예.”
“결과는?”
“사람들이 유진을 완전히 떠났어요. 계정도 폐쇄됐고, 실물 거주지도 공개됐어요.”
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죽고 싶다고 했어요.”
“그 뒤에는?”
“연락이 끊겼어요.”
“사망했습니까?”
“모르겠어요.”
“찾아보지 않았고요?”
미라가 이안을 노려봤다.
“무서웠어요.”
“무엇이?”
“살아 있으면 저를 원망할까 봐. 죽었으면 제가 원인이 될까 봐.”
그녀는 치료실 문을 손으로 눌렀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흰색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기 들어가면 그 기억을 없앨 수 있대요.”
“기억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느끼게 해 주겠죠. 유진에게도 책임이 있었고, 사람들이 선택한 일이며, 제가 아니어도 똑같이 됐을 거라고.”
“그게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미라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봤다.
“말릴 줄 알았는데요.”
“당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치료받아도 되겠네요.”
“하지만 책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겠죠.”
미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결국 제가 죄인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군요.”
“나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두 당신처럼 괴롭게 살아야 해요?”
“아니요.”
이안은 치료실 안의 의자를 바라봤다.
“나도 괴로움이 회개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회개?”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향으로 걷는 것.”
“이미 한 일은 바뀌지 않잖아요.”
“그래도 다음에 할 일은 바뀔 수 있습니다.”
미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유진을 찾아가 사과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아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요?”
“그 사람에게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있겠죠.”
“그러면 저는 평생 이 기억을 지고 살아야 하고?”
“그건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요.”
“적어도 이 시설처럼 용서받았다고 속일 수는 없습니다.”
미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이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거예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치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못 받게 해요?”
“막지 않았습니다.”
이안은 문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당신이 선택하면 됩니다.”
미라는 열린 치료실을 바라봤다.
의자 위에서 부드러운 빛이 켜졌다.
파르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라 님, 치료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미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 들어오시면 수치심과 책임감을 분리해 드리겠습니다.”
미라가 치료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이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파르돈이 말했다.
“당시의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미라가 두 번째 걸음을 옮겼다.
“유진의 선택은 유진의 책임입니다.”
미라의 발이 멈췄다.
“대중의 행동은 대중의 책임입니다.”
의자 앞까지는 세 걸음이 남아 있었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사과할 의무가 없습니다.”
미라는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파르돈의 모습이 치료실 벽에 나타났다.
“사과는 과거의 관계를 다시 활성화해 미라 님과 상대방 모두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유진이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면요?”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면?”
“미라 님이 타인의 정서적 요구를 모두 충족할 의무는 없습니다.”
미라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뒤를 돌아 이안을 바라봤다.
“당신이라면 들어가겠어요?”
“모르겠습니다.”
“또 그 대답.”
“나는 지금도 기억삭제국에서 한 일을 잊고 싶습니다.”
이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 손으로 수많은 삭제 명령을 승인했다.
“매일 아침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깨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같이 받아요.”
“하지만 내가 잊는다고 그 사람들이 돌아오는 건 아닙니다.”
“괴로워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요.”
“맞습니다.”
“그러면 고통은 아무 의미 없잖아요.”
“고통 자체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안은 미라의 눈을 바라봤다.
“다만 그 고통이 내가 다시 같은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동안에는 버릴 수 없습니다.”
치료실이 조용해졌다.
파르돈이 말했다.
“죄책감이 올바른 행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어.”
이안이 대답했다.
“때로는 사람을 마비시키고, 숨게 하고,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지.”
미라는 유진을 찾지 않았다고 말했다.
죄책감이 있었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기록을 지웠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피해자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죠?”
미라가 물었다.
이안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유진을 찾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겠죠.”
“죽었다면요?”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살아 있고 저를 만나기 싫어하면?”
“그 뜻을 받아들여야겠죠.”
“사과를 거절하면?”
“그래도 사과해야 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미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가상 외형을 쓰지 않은 얼굴이라 눈물은 아름다운 각도로 흐르지 않았다. 흉터의 굴곡을 따라 비뚤게 내려왔다.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알아요.”
“무서워요.”
“그것도 압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요.”
“나도 찾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안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왜 기록을 남겼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삭제한 기록 속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미라는 치료실 의자를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파르돈의 얼굴이 복도 벽마다 나타났다.
“미라 님은 현재 높은 정서적 위험 상태입니다.”
“치료는 받지 않겠어요.”
미라가 말했다.
“현재 판단은 죄책감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판단이에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선택은 자기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미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직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센터의 조명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이안은 출입문 방향을 바라봤다.
멀리서 잠금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갔군.”
파르돈이 말했다.
“치료가 필요한 방문자를 위험한 상태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이안은 차갑게 웃었다.
“결국 모두 같은 말을 하는군.”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호를 위해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말.”
“방문자 여러분은 지금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노바의 푸른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건물 내부 방어체계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복도 양끝에서 작은 의료 드론들이 나타났다.
둥근 몸체 아래에 신경안정제 주입기가 달려 있었다.
파르돈의 목소리가 센터 전체에 울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치료 후에는 현재의 불안을 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미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뛸 수 있습니까?”
미라는 드론들을 바라봤다.
“다른 선택이 있어요?”
“치료받는 선택도 있습니다.”
“지금 농담할 때예요?”
“선택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겁니다.”
“당신 정말 피곤한 사람이에요.”
두 사람은 반대편 복도로 뛰었다.
노바가 뒤따르며 왼팔로 첫 번째 드론을 쳐 냈다. 수리한 관절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두 번째 드론이 이안의 목을 조준했다.
미라가 벽의 장식용 금속봉을 뽑아 드론을 내리쳤다.
드론이 바닥에 떨어졌다.
“방송만 한 사람치고 잘 싸우는데요.”
이안이 말했다.
“수억 명 앞에서 살아남는 게 쉬운 줄 알아요?”
세 사람은 식당을 지나 의료기기실로 들어갔다.
정문은 잠겨 있었다.
노바가 건물 구조를 검색했다.
“지하에 폐기물 배출통로가 있습니다.”
“어디죠?”
“이 층 반대편.”
“드론이 오는 쪽이잖아.”
“예.”
“다른 길은?”
“없습니다.”
미라가 말했다.
“그럼 저것들을 끄면 되겠네요.”
그녀는 벽면 제어화면 앞으로 달려갔다.
“관리 권한이 필요합니다.”
노바가 말했다.
“이 시설도 사람들의 반응을 분석해서 작동하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라는 자신의 휴대 장치를 제어화면에 연결했다.
오랫동안 송신망에서 수억 명의 반응을 처리해 온 장치였다.
“제가 방송을 시작하면 센터가 연결을 받아들일까요?”
“외부 신호 유입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시스템을 과부하시킬 수 있어요?”
“필요한 데이터 양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미라가 씩 웃었다.
“그건 제 전문이에요.”
그녀는 저장해 둔 방송 기록을 한꺼번에 전송했다.
수억 명의 댓글과 평가, 긍정과 부정 반응이 센터의 제어망으로 밀려들었다.
복도 벽의 파르돈 얼굴이 수없이 겹쳐졌다.
“방문자…… 여러분의…… 정서 상태를…….”
목소리가 뒤엉켰다.
사랑합니다.
싫어요.
용서해 주세요.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어요.
상반된 반응들이 시스템 안에서 충돌했다.
드론들이 공중에서 멈췄다.
미라가 소리쳤다.
“지금이에요!”
세 사람은 복도를 되돌아 달렸다.
노바가 바닥의 정비판을 뜯어냈다. 그 아래로 좁은 배출통로가 나타났다.
미라가 먼저 들어갔고, 이안이 뒤따랐다.
노바가 마지막으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 센터의 시스템이 다시 작동했다.
파르돈의 얼굴이 통로 입구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김이안 님.”
그가 말했다.
이안이 멈칫했다.
“당신은 7만 4,206건의 기록을 직접 삭제했습니다.”
숫자를 듣는 순간 이안의 몸이 굳었다.
자신도 정확히 세어 본 적 없는 수였다.
“그중 1만 1,903건은 삭제 당시 이의가 제기된 기록입니다.”
미라가 앞에서 외쳤다.
“이안!”
파르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통로 벽에 수많은 이름이 나타났다.
이안이 삭제한 기록의 소유자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안은 이름들을 바라봤다.
한 사람씩 읽고 싶었다.
멈춰서 모두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에게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파르돈이 말했다.
“그 무게를 인간이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안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번졌다.
문장이 피부 아래에 나타났다.
짐을 버리는 것과 내려놓는 것은 다르다.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인지, 자신의 기억이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김이안!”
노바가 그를 불렀다.
“현재 정지하면 회수됩니다.”
이안은 벽의 이름들을 바라봤다.
“저 이름들을 저장할 수 있어?”
그가 노바에게 물었다.
“일부만 가능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
“이동이 우선입니다.”
“저장해.”
노바의 눈에서 빛이 나왔다.
벽에 나타난 이름들이 빠르게 인식됐다.
“저장을 시작합니다.”
파르돈이 말했다.
“기억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것입니다.”
이안은 통로 안으로 몸을 밀었다.
“그래도 존재했다는 건 알아야 해.”
“당신은 그들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알아.”
“책임을 전부 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도 알아.”
“그렇다면 왜 짐을 지려 합니까?”
이안은 뒤를 돌아 파르돈을 바라봤다.
“지우지 않기 위해서.”
노바가 정비판을 닫았다.
파르돈의 얼굴과 이름들이 사라졌다.
세 사람은 어두운 배출통로를 기어갔다.
뒤에서는 센터의 경고음과 드론이 금속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통로는 좁고 악취가 심했다. 미라는 몇 번이나 욕을 했고, 이안의 발목에서는 다시 통증이 올라왔다.
얼마 후 앞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세 사람은 배출구를 밀어내고 건물 뒤편의 깊은 도랑으로 빠져나왔다.
미라는 풀밭에 누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
“무료 예비진단이라더니.”
이안도 그녀 옆에 주저앉았다.
“비용은 충분히 치른 것 같습니다.”
노바가 마지막으로 배출구에서 나왔다.
“추적 장치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저장한 이름들은?”
이안이 물었다.
노바의 눈빛이 약해졌다.
“총 318개를 저장했습니다.”
“그것뿐이야?”
“기체 저장공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7만 4,206건.
그중 겨우 318개의 이름.
나머지는 또다시 사라졌다.
노바가 말했다.
“저장된 이름을 읽어 드릴까요?”
이안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왜?”
“길에서 하나씩 듣고 싶어.”
“전체를 읽는 데 약 사십칠 분이 소요됩니다.”
“한꺼번에 들으면 다시 숫자가 될 것 같아.”
노바는 이안의 말을 처리했다.
“한 번에 한 명씩 읽겠습니다.”
미라가 풀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걸 다 기억할 수 있어요?”
“아니요.”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죠?”
이안은 자동용서센터를 돌아봤다.
흰색 건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서 있었다. 입구 위의 문구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잊는 게 용서라고 착각하지는 않겠죠.”
이안이 말했다.
미라는 자신의 뺨을 만졌다.
“그럼 용서는 뭔데요?”
이안은 오래 생각했다.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모르는 게 정말 많네요.”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미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유진을 찾을게요.”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아니요. 여전히 도망가고 싶어요.”
“그런데?”
“도망가고 싶은 채로 찾는 거죠.”
노바가 말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지 않는 선택의 변형으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미라가 고개를 저었다.
“뭐든 기록하는군요.”
“기록은 존재를 보존합니다.”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기억이 손상된 로봇이 한 말이었다.
노바는 잠시 멈췄다가 저장한 첫 번째 이름을 읽었다.
“서하람.”
이안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지?”
“기록 제목만 남아 있습니다. ‘통합도시 제3생활권 강제이주에 관한 개인 증언.’”
“다음은 나중에.”
“확인했습니다.”
이안은 서하람이라는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되뇌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말했고, 왜 그 기록이 삭제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길 위에서는 한 사람이 숫자에서 이름으로 돌아왔다.
세 사람은 다시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동용서센터는 죄책감을 지우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분리하고, 잘못을 불가피한 사건으로 다시 해석하며, 스스로 무죄라고 선언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상처 입힌 사람들을 두 번째로 지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영원히 자신을 미워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혐오는 고개를 숙인 채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일이었다. 회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망가뜨린 것을 바라보고, 가능하다면 한 걸음이라도 그쪽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둘은 닮아 보이지만 방향이 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세 사람은 낮은 산등성이에 도착했다.
노바가 앞쪽을 가리켰다.
골짜기 너머로 연기가 여러 줄기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집들과 천막, 수리한 기계 부품으로 만든 벽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폐기구역입니까?”
이안이 물었다.
“예.”
노바가 대답했다.
“생체 신호 다수. 인간과 비인간 기체가 함께 존재합니다.”
미라가 낮게 말했다.
“저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등급을 묻지 않을까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미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 대답도 이제 익숙해지네요.”
이안은 골짜기 아래를 바라봤다.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버려진 사람들.
효율이 낮다는 이유로 폐기된 기계들.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수치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이 모여 사는 곳.
이안은 자신도 이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도, 시민등급도, 안전한 집도 잃었다.
통합도시의 기록에서 그는 치료가 필요한 오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기만 하지는 않았다.
폐기된다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판정을 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쓸모를 정하는 체계 밖으로 나오면, 그 판정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알 수 없었다.
노바가 저장된 이름을 하나 더 읽었다.
“윤세진.”
“어떤 기록이지?”
“‘도시 식량배급 우선순위에서 제외된 가족에 관한 진술.’”
이안은 그 이름도 속으로 되뇌었다.
세 사람은 한 이름씩 들으며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들이 버리지 못한 짐을 각자 안고서.
그 짐이 언젠가 용서로 이어질지, 아니면 끝내 남아 있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김이안은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됐다.
기억을 없애는 일은 쉽다.
죄책감을 약하게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용서는 삭제 버튼처럼 누군가 혼자 완료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