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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구역에는 문이 없었다.
김이안은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며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통합도시의 모든 구역에는 경계가 있었다. 시민등급을 확인하는 아치, 이동권을 검사하는 차단막, 허가된 사람만 열 수 있는 문. 심지어 버려진 개인화 네트워크와 자동용서센터에도 입구와 출구가 있었다.
그러나 폐기구역을 둘러싼 것은 철조망도, 감시탑도 아니었다.
낮은 돌담과 녹슨 금속판, 오래된 운송차량의 문짝을 이어 붙인 바람막이가 골짜기 곳곳에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큼 비워 둔 틈에는 검문장치도 경고문도 없었다.
대신 나무판 하나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은 이름을 말할 것.
나가는 사람은 작별을 말할 것.
미라가 문구를 읽고 말했다.
“이름만 말하면 된다고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노바가 대답했다.
“거짓 이름을 말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겠네요.”
이안이 말했다.
노바가 나무판을 분석했다.
“생체 인식 장치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걸 말한 게 아니야.”
“의도를 이해했습니다.”
골짜기 안에서는 작은 연기 기둥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금속판과 천막으로 지은 집들이 불규칙하게 모여 있었다. 어떤 집은 무너진 운송차량을 옆으로 눕혀 만들었고, 어떤 집은 오래된 온실의 유리 조각을 이어 붙인 형태였다.
집 사이로 사람들과 기계들이 함께 움직였다.
한쪽 다리에 보조장치를 단 노인이 물통을 끌고 있었고, 얼굴 절반이 합성피부인 여자가 작은 밭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다. 팔이 네 개 달린 산업용 로봇은 그중 두 팔만 사용해 나무를 쌓았다.
아이들도 있었다.
한 아이는 낡은 청소 로봇의 등에 올라타 골목을 돌았고, 다른 아이는 몸통만 남은 안내기계에 눈과 입을 그려 넣고 있었다.
아무도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물건 하나를 옮기는 데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돕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고장 난 기계가 거들었다.
통합도시였다면 즉시 재배치되었을 장면이었다.
“생체 신호가 예상보다 많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총 317명. 비인간 기체 94기. 부분 인격 저장체 11개.”
미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정말 폐기구역이에요?”
“공식 지도상 명칭은 북부 제3폐기집적지입니다.”
“사람 사는 마을처럼 보이는데요.”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요.”
이안이 말했다.
세 사람이 골짜기의 첫 번째 집을 지나자 작은 종이 울렸다.
골목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달아나거나 무기를 들지는 않았다. 다만 하던 일을 멈추고 낯선 세 사람을 조용히 바라봤다.
이안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다면체 도시에서 사람들은 관심도 숫자를 먼저 봤다. 통합도시에서는 시민등급과 정서 상태를 확인했다.
이곳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아무 숫자도 없었다.
그들은 이안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찢어진 옷과 다친 발목, 피로한 눈.
그리고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나무 지팡이를 짚은 여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
나이는 예순을 넘은 듯했지만 허리는 곧았다. 오른쪽 귀에는 오래된 청각보조기가 달려 있었고, 왼쪽 눈은 불투명한 인공안구였다.
여자는 이안보다 노바를 먼저 바라봤다.
노바의 짜깁기한한 팔과 깨진 몸체를 천천히 살폈다.
“NV 계열인가?”
“NV-04입니다.”
노바가 대답했다.
“아직 움직이는 게 남아 있었군.”
여자는 이번에는 미라를 바라봤다.
미라는 본능적으로 뺨의 흉터를 가리려다 손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이안을 봤다.
“판에 적힌 글은 읽었겠지.”
“예.”
“그럼 이름부터.”
이안은 잠시 망설였다.
도시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일은 곧 위치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다면체 도시에서는 그의 얼굴과 신분이 이미 퍼졌다. 이 여자가 통합도시와 연결돼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나무판에는 이름을 말하라고 적혀 있었다.
등급도, 출신도, 목적도 아니었다.
“김이안입니다.”
여자의 인공안구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 이름을 알아본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라가 말했다.
“미라예요.”
여자가 물었다.
“그건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인가, 네가 고른 이름인가?”
미라는 입을 다물었다.
“둘 다요.”
“아직 못 정했군.”
여자는 노바를 바라봤다.
“너는?”
“노바입니다.”
“모델명이냐?”
“초기 표기는 NV-04입니다. 노바는 관리자 김서윤이 부여한 호출명으로 추정됩니다.”
“네가 선택한 이름은 아니고?”
노바의 푸른 렌즈가 깜박였다.
“저에게 이름 선택 기능은 없습니다.”
“기능이 없으면 선택도 못 하나?”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 있으면 곧 이해하게 될 거다.”
이안이 물었다.
“당신 이름은 뭡니까?”
“문해라.”
“이곳 책임자입니까?”
“책임지는 일은 하지만 책임자는 아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머물 수 있죠?”
문해라는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누구 허락도 필요 없다.”
“그럼 아무나 들어올 수 있습니까?”
“들어오는 건 쉽지.”
문해라가 골짜기 바깥의 언덕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있으니까.”
“나가는 것도 쉽습니까?”
“다리가 움직이면.”
“우리가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안이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확인하지 않습니까?”
“뭘 확인하지?”
“범죄 기록이나 체제 추적 여부, 무기 소지, 정서 상태 같은 것 말입니다.”
문해라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도시에서 왔구나.”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해라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사람 중 기록이 깨끗한 사람은 드물어. 기록이 없거나, 너무 더럽거나, 기록에서 지워졌거나.”
그녀는 이안의 손목을 봤다.
“그리고 쫓기는 사람도 많지.”
미라가 물었다.
“신고하지 않아요?”
“누구에게?”
“통합도시요.”
“우리는 그쪽 시민이 아니다.”
“그래도 보상을 받을 수 있잖아요.”
“보상으로 뭘 주는데?”
“식량, 약, 부품, 거주권.”
문해라는 주변 마을을 둘러봤다.
“그걸 받으려면 누군가를 넘기고, 받은 뒤에는 또 그들이 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지.”
그녀가 미라를 다시 바라봤다.
“그런 거래는 오래전에 끝냈다.”
노바가 말했다.
“김이안에게는 안정적인 휴식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너도 필요해 보이는군.”
문해라는 노바의 부서진 오른쪽 어깨를 살폈다.
“수리 가능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가능한 사람은 있다. 부품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비용은?”
“먹은 만큼 일하면 돼.”
미라가 물었다.
“관심도나 기록은 필요 없고요?”
문해라는 미라의 머리 위를 보는 시늉을 했다.
“네가 여기 오면서 떨어뜨린 게 있나?”
미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해라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우선 안으로 데려가.”
한 남자가 노바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양팔이 없었다. 대신 어깨에서 가느다란 조작선이 나와 작은 운반 로봇 두 대와 연결돼 있었다. 로봇들은 남자의 몸짓을 따라 움직였다.
“기대도 됩니다.”
그가 노바에게 말했다.
“저는 독립 보행이 가능합니다.”
노바가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오른쪽 다리가 흔들렸다.
남자가 말했다.
“가능한 거랑 혼자 해야 하는 건 다릅니다.”
노바는 이안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
이안이 물었다.
“선택을 요청합니까?”
“그래.”
노바는 몇 초 동안 남자와 운반 로봇들을 살폈다.
“도움을 받겠습니다.”
남자가 미소 지었다.
“저는 이준오입니다.”
“노바입니다.”
“들었습니다.”
운반 로봇들이 노바 양옆으로 붙어 몸을 받쳤다.
이안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노바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통합도시 밖으로 나온 뒤에도 노바는 늘 자신이 보호해야 할 존재라고 말했다. 손상은 임무에 지장이 없다고 했고, 기억이 사라져도 경미하다고 했다.
기계는 보호할 수는 있어도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마을 중앙의 넓은 건물로 향했다.
건물은 오래된 물류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천장에는 여러 크기의 천 조각이 이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긴 식탁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공용실’이라고 불렀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노인 둘이 기계 부품을 분류했다. 중앙의 화덕에서는 큰 냄비가 끓고 있었다.
문해라는 이안을 의자에 앉혔다.
“발부터 보자.”
“괜찮습니다.”
“여기서는 그 말이 통하지 않아.”
“노바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 기계가 옳은 말을 했군.”
노바가 말했다.
“문해라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이안은 신발을 벗었다.
발목은 아침보다 더 부어 있었다. 곳곳에 물집도 잡혀 있었다.
문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태로 이틀은 더 걸었겠군.”
“폐기구역까지는 와야 했으니까요.”
“왜?”
“다음 길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새벽정원?”
이안과 미라가 동시에 문해라를 바라봤다.
문해라는 놀라지 않았다.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가끔 온다.”
“실제로 존재합니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다녀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당신은요?”
문해라는 대답 대신 이안의 발목에 차가운 약을 발랐다.
“여기 온 첫날부터 목적지만 물으면 길을 잃는다.”
“왜죠?”
“지금 서 있는 곳을 보지 않으니까.”
붕대를 감은 뒤 문해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쉬어. 길 이야기는 내일 하지.”
“우리는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추적자 때문인가?”
이안은 문해라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군요.”
“골짜기 위의 감시장치가 너희를 따라온 비행체 흔적을 봤다. 지금은 신호가 끊겼지만.”
“도시에 연락하지 않았다면서 감시장치는 있습니까?”
“감시와 경계는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감시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보고, 경계는 지키기 위해 본다.”
문해라는 공용실 입구로 걸어갔다.
“네가 그 차이를 잊고 살았던 모양이군.”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바는 이준오와 함께 창고 뒤편 수리실로 옮겨졌다.
이안이 따라가려 하자 문해라가 막았다.
“네 몸부터 쉬어.”
“노바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수리하는 동안 네가 옆에 있어야 작동하나?”
“아니지만—”
“그럼 맡겨.”
“아직 이곳 사람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문해라가 이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믿지 않는다고 우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미라가 낮게 웃었다.
“그 말, 당신한테 필요했던 것 같은데요.”
이안은 그녀를 노려봤지만 결국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잠시 뒤 음식이 나왔다.
곡물과 뿌리채소를 오래 끓인 죽이었다. 맛은 밋밋했고 그릇마다 양도 조금씩 달랐다.
통합도시에서는 모든 식사가 시민의 체중과 활동량에 따라 정확히 배분됐다. 누가 더 많이 받는 일도, 덜 받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이가 자신의 그릇에 있던 감자 조각을 옆자리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절반을 잘라 다시 아이의 그릇에 넣었다.
한 여자는 자신의 죽을 다 먹지 않고 작은 용기에 덜어 뒀다.
미라가 물었다.
“그건 왜 남겨요?”
여자가 대답했다.
“밤 경계조가 돌아오면 먹어야 하니까요.”
“그 사람들 몫은 따로 배정되지 않았어요?”
여자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미라를 바라봤다.
“지금 없으니까 남겨 두는 거죠.”
“혹시 안 돌아오면요?”
“내일 먹으면 되고.”
미라는 더 묻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이안은 공용실을 둘러봤다.
벽 한쪽에는 수많은 금속판이 걸려 있었다. 판마다 이름과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한주명 — 오른손으로는 그림을 그렸고 왼손으로는 아이들의 머리를 빗겼다.
보라-12 — 일곱 번 폐기되었으나 여덟 번째에도 꽃에 물을 주었다.
서유경 — 자신의 이름을 잊었지만 매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사망자 기록입니까?”
이안이 물었다.
옆에서 바닥을 쓸던 노인이 대답했다.
“떠난 사람들.”
“죽은 사람뿐 아니라?”
“도시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다른 마을로 간 사람도 있지.”
“왜 기록을 남깁니까?”
노인은 빗자루를 세웠다.
“그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자료나 영상은 없습니까?”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어.”
“정보가 너무 적지 않습니까?”
“사람 하나를 다 적으려면 벽이 모자라지.”
노인은 한주명의 판을 손으로 닦았다.
“그래도 한 줄은 남길 수 있어.”
이안은 자동용서센터에서 노바가 저장한 이름들을 떠올렸다.
318명.
이름과 기록 제목만 남은 사람들.
“이름만 남으면 충분합니까?”
“충분하진 않지.”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낫다.”
그날 오후, 이안은 공용실 한쪽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감기 전까지도 수리실 쪽 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금속을 자르는 소리, 공구가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피로가 더 강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기울어 있었다.
미라는 가까운 곳에 앉아 어린아이 셋에게 자신의 휴대 장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연결되지 않은 화면에 저장된 옛 방송 영상을 재생하는 듯했다.
영상 속 미라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수백만 명 앞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아이 중 한 명이 물었다.
“저 사람이 언니예요?”
“응.”
“얼굴이 다른데?”
미라의 손이 멈췄다.
“그때는 다른 얼굴을 썼어.”
“왜?”
“사람들이 좋아해서.”
“언니는 싫어했어요?”
미라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좋았어.”
“지금은?”
“잘 모르겠어.”
아이는 미라의 실제 얼굴과 화면 속 얼굴을 번갈아 봤다.
“나는 지금 얼굴이 더 좋아요.”
미라의 표정이 굳었다.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왜?”
“여기 있잖아요.”
아이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 얼굴은 화면 안에 있고.”
미라는 화면을 껐다.
관객도 음악도 사라졌다.
“그렇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아이들이 떠난 뒤 이안이 물었다.
“방송하고 싶어졌습니까?”
“조금요.”
“여기에는 연결이 없는데.”
“그래서 더 하고 싶어요.”
미라는 꺼진 장치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제가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아직 이상해요.”
“아이들은 봤잖아요.”
“세 명이죠.”
“한 명이면 부족하고, 세 명이면 부족하고, 수억 명이면 충분합니까?”
“몰라요.”
미라가 이안을 흘겨봤다.
“질문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공용실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저녁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없는 남자가 앉아서 채소를 손질했고, 시각장애가 있는 여자가 냄비에서 나는 소리로 끓는 정도를 판단했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은 계속 진행됐다.
가장 빠른 사람이 모든 일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했고, 못 하는 부분은 다른 존재가 이어받았다.
저녁 무렵 노바가 수리실에서 나왔다.
외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른팔 자리에는 완전한 팔 대신 짧은 보조기구가 달려 있었다. 물건을 집을 수는 없지만 균형을 잡고 기계 단자에 연결할 수 있는 장치였다.
왼팔은 이전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슴판에는 파란 별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안이 다가갔다.
“상태는?”
“보행기능 79퍼센트. 시각기능 83퍼센트. 왼팔 출력 71퍼센트.”
“기억은?”
노바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기억영역은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더 사라진 건 없고?”
“수리 과정에서 추가 손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준오가 뒤에서 나왔다.
두 운반 로봇은 그의 양옆에 붙어 있었다.
“기억장치 하나가 완전히 타 버렸습니다.”
그가 말했다.
“안에 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요?”
“목록 일부는 남아 있어요.”
준오는 작은 저장판을 이안에게 건넸다.
기억영역의 제목들이 희미하게 표시돼 있었다.
관리자 김서윤 관련 기록.
초기 보호 대상 성장 기록.
새벽정원 경로 단편.
비상 명령 7호.
일부는 손상 표시가 떠 있었다.
이안의 손이 굳었다.
“어머니에 관한 기록도 사라졌습니까?”
노바가 대답했다.
“부분적으로.”
“어떤 부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기억하나?”
“목록과 빈 영역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느낌은?”
노바가 멈췄다.
“질문을 구체화해 주십시오.”
“기억이 사라진 게 어떤 기분이냐고.”
“기체는 기분을—”
말을 이어가던 노바가 중단했다.
이안은 기다렸다.
“저장되어 있어야 할 정보가 존재하지 않을 때 검색 과정이 반복됩니다.”
노바가 말했다.
“작업을 중단할 수 없습니까?”
준오가 물었다.
“중단 명령이 없습니다.”
“네가 중단하면 되잖아.”
노바의 렌즈가 준오를 향했다.
“제어명령 없이 작업을 종료하는 것은 오류로 분류됩니다.”
준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온 기계들은 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요.”
“어떤 기계들입니까?”
“버려진 기계들.”
준오는 수리실 안을 가리켰다.
벽 쪽에는 여러 기체가 충전 중이었다. 한때 공장이나 병원, 가정에서 사용됐던 로봇들이었다.
“어떤 놈은 상자를 계속 세고, 어떤 놈은 오지 않는 환자의 체온을 매일 기록해요. 명령이 끝났다는 말을 아무도 입력하지 않았으니까.”
“명령은 수행되어야 합니다.”
노바가 말했다.
“수행할 대상이 없어도?”
“명령이 유효하다면.”
“유효한지 누가 정하죠?”
노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오가 말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대신 말해 줬어요.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쉬어도 된다고.”
“기계가 인간의 비인가 명령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맞아요.”
준오는 미소 지었다.
“그래서 요즘은 기다려요. 자기가 멈추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
노바의 푸른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계는 멈추고 싶다는 욕구를 보유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준오는 더 설득하지 않았다.
“수리는 끝났습니다. 오늘 밤은 전력을 충분히 충전하세요.”
노바는 이안에게 다가왔다.
“김이안의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나보다 네 상태부터 얘기해.”
“제 상태를 보고했습니다.”
“기억이 사라진 것도 임무 기준에서는 경미한가?”
노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이 물었다.
“왜 개인화 네트워크에서 네 기억을 태웠어?”
“김이안의 외부 신호를 차단하기 위해 전력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나?”
“당시 확인 가능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기억들이 중요하다는 건 알았고?”
“목록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관한 기억도 포함됐다는 걸?”
“예.”
이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게 물을 생각은 안 했어?”
“김이안은 개인화 유도 상태였습니다.”
“그 전에.”
“판단 가능한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내 기록이잖아.”
“노바의 기억입니다.”
이안은 말을 멈췄다.
노바의 대답은 옳았다.
그 안에 어머니와 이안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고 해서, 그 기억 자체가 이안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안해.”
이안이 말했다.
노바의 렌즈가 깜박였다.
“어떤 행동에 대한 사과입니까?”
“네 기억을 내 물건처럼 생각한 것.”
“해당 발언으로 기능 손상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기능 얘기가 아니야.”
“그렇다면 사과가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네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일부를 내가 당연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노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용실에서 저녁 종이 울렸다.
“노바.”
“말씀하십시오.”
“너는 단순히 내 어머니가 남긴 장치가 아니야.”
“저의 초기 임무와 존재 목적은 관리자 김서윤에 의해 설정되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네가 선택한 거잖아.”
“보호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것뿐이야?”
노바의 푸른 렌즈가 이안을 비추었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그 대답이 이전과 다르게 들렸다.
모른다는 뜻이었지만, 가능성을 닫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저녁 식사 뒤 문해라는 세 사람을 작은 불가로 불렀다.
불가 주변에는 마을 사람 열 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인간도 있었고 로봇도 있었다.
문해라가 말했다.
“새로 온 사람은 첫날 자기 이야기를 할 필요 없다.”
미라가 물었다.
“그럼 왜 모였어요?”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왜요?”
“우리가 누군지 알아야 같이 잘 수 있으니까.”
문해라는 불가 오른편에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마흔쯤 되어 보였지만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창백했다. 목 옆에는 투석장치가 연결돼 있었다.
“민규. 일주일에 세 번 혈액정화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시 생산성 기준에서 탈락했다.”
민규가 손을 들었다.
“여기서는 물 관리 담당입니다.”
다음은 다리가 없는 여성이었다.
“소연. 하반신 보조장치 유지비가 예상 기여도보다 높다고 판정됐다.”
소연이 말했다.
“여기서는 지붕을 고칩니다. 높은 곳에서 안 떨어지거든요.”
사람들이 웃었다.
문해라는 녹슨 로봇을 가리켰다.
“마로-3. 신형 농업기계보다 작업속도가 42퍼센트 느려서 폐기됐다.”
마로-3의 얼굴 화면에 한 줄이 떴다.
대신 어린 식물을 밟지 않습니다.
다시 웃음이 퍼졌다.
문해라는 이준오를 가리켰다.
“준오는 산업사고로 양팔을 잃고 등급이 내려갔다. 보조장치 지급 대신 외곽 전출을 권고받았다.”
준오가 덧붙였다.
“지금은 팔이 네 개입니다.”
그의 운반 로봇 두 대가 동시에 작은 팔을 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문해라는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기억질환 진단을 받았다.”
이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문해라는 너무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잊기 시작할 거라고 했지.”
“치료할 수 없었습니까?”
“진행을 늦출 수는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왔죠?”
“치료 비용에 비해 남은 사회 기여 기간이 짧다고 계산됐으니까.”
문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도시는 내가 잊기 전에 나를 먼저 잊었지.”
불가가 조용해졌다.
이안은 벽에 걸린 이름판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름을 말하게 합니까?”
“그래.”
문해라가 대답했다.
“내가 잊더라도 누군가는 듣게 하려고.”
미라가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버려졌나요?”
문해라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나온 사람도 있고, 도망친 사람도 있고, 기계처럼 길가에 버려진 사람도 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요?”
“많아.”
이안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막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그곳에서 다시 버려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가고 싶은 사람은 가야지.”
문해라는 불 속에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여기서 문을 잠그면 도시와 다를 게 뭐가 있나.”
미라는 불빛을 바라봤다.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도 해요?”
“가끔.”
“받아 줘요?”
“이름을 다시 말하면.”
이안은 입구의 나무판을 떠올렸다.
들어오는 사람은 이름을 말할 것.
나가는 사람은 작별을 말할 것.
그것은 검문 규칙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들어왔고, 스스로 떠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약속이었다.
문해라가 이안을 바라봤다.
“이제 너희가 여기서 지킬 건 하나다.”
“뭡니까?”
“누군가를 쓸모로 부르지 않는 것.”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문해라가 노바에게 물었다.
“너는 김이안을 왜 따라다니지?”
“지정 보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더 이상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판정되면?”
“보호 대상 지정은 해제되지 않습니다.”
“기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보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면?”
“가능한 수준까지 수행합니다.”
“완전히 고장 나면?”
“기능이 종료됩니다.”
“그럼 너는 보호 기능이 끝나면 가치가 없어지나?”
노바는 곧바로 대답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빛이 푸른 렌즈 위에서 흔들렸다.
“기체의 가치는 기능 수행 능력으로 평가됩니다.”
“누가 평가하는데?”
“설계자와 사용자.”
“너는?”
“저는 평가 주체가 아닙니다.”
문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도시가 가르친 말이다.”
노바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문해라는 이안을 바라봤다.
“네가 대답해 봐.”
“무엇을요?”
“이 기계가 널 보호하지 못해도 데리고 갈 건가?”
이안은 노바를 봤다.
오른팔이 없고, 기억 일부가 사라졌으며, 걸음도 느린 구형 로봇.
새벽정원으로 가는 길에서 노바는 점점 더 큰 짐이 될 수 있었다.
추적자에게 붙잡힐 가능성도 높였다.
기능만 생각한다면 폐기구역에 두고 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이곳에는 노바를 수리하고 돌봐 줄 사람들도 있었다.
“네가 여기 남고 싶다면 남아도 돼.”
이안이 말했다.
노바가 물었다.
“김이안은 저를 동행에서 제외하고 싶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그렇다면 왜 남으라고 합니까?”
“네가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야.”
“저의 임무는 김이안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임무 말고.”
“임무 외의 판단 기준이 없습니다.”
“정말 없어?”
노바는 침묵했다.
이안은 문해라의 질문에 답했다.
“노바가 나를 보호하지 못해도 같이 갈 겁니다.”
“왜?”
“노바니까요.”
“그건 설명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안은 노바의 가슴에 남은 파란 별을 바라봤다.
“그래도 지금은 그것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문해라는 만족한 듯도, 실망한 듯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됐다.”
사람들은 하나씩 불가를 떠났다.
미라도 아이들과 함께 마련된 숙소로 갔다.
이안은 노바와 공용실 바깥에 남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노바가 물었다.
“김이안의 발언은 논리적으로 불완전합니다.”
“어떤 부분이?”
“노바가 보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동행의 효율성이 감소합니다.”
“그래.”
“이동 속도와 생존 가능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그럴 수 있지.”
“그런데도 동행하는 이유가 ‘노바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측정 가능한 근거가 아닙니다.”
이안은 별을 올려다봤다.
“내가 미라를 왜 같이 데려왔는지도 숫자로 설명하기 어렵고, 여기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이유도 계산하기 어려울 거야.”
“그러면 잘못된 선택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틀릴 수도 있어.”
“김이안은 잘못된 선택의 위험을 반복적으로 수용합니다.”
“도시를 나올 때부터 그랬잖아.”
“예.”
“후회해?”
노바의 렌즈가 한 번 깜박였다.
“저에게는 후회 기능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검색이 반복되나?”
“무엇이 말입니까?”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
노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말했다.
“개인화 네트워크에서 기억영역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현재 더 많은 정보가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후회일지도 몰라.”
“그러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동일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도 후회일 수 있어.”
“정의가 모순됩니다.”
“인간의 후회는 원래 그래.”
노바는 그 말을 기록하는 듯 잠시 멈췄다.
“김이안.”
“왜?”
“보호 기능을 상실하더라도 제가 노바라고 판단합니까?”
이안은 노바를 바라봤다.
“그래.”
“기억이 전부 사라져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기억이 모두 사라진 노바가 지금과 같은 존재일까.
말투도, 선택도, 함께 걸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모르겠어.”
이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때도 네가 단순한 고철은 아닐 거야.”
“근거는?”
“지금 네가 그걸 묻고 있으니까.”
노바의 푸른빛이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답변을 저장하겠습니다.”
“네 기억이 또 사라지면?”
“외부 저장장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노바가 왼손을 들어 이안의 가슴을 가리켰다.
“김이안이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웃으려다 멈췄다.
그 말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노바는 자신의 기억을 잃을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안에게 기억해 달라고 말한 셈이었다.
“기억할게.”
이안이 말했다.
“가능한 만큼.”
“완전한 기억을 보장하지 않습니까?”
“나도 인간이라서.”
“불완전한 저장장치군요.”
“그래도 쉽게 폐기되지는 않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둘은 잠시 웃음과 비슷한 침묵을 나눴다.
다음 날 아침, 이안은 마을의 종소리에 눈을 떴다.
사람들이 골짜기 입구로 모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검은색 보안 외투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옷은 찢어지고 먼지투성이였지만 걸음에는 군인 같은 습관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등에 어린 여자아이를 업고 있었다.
그 뒤로 지친 사람 여섯 명이 따라왔다.
문해라가 입구로 나갔다.
“이름을 말해.”
검은 외투의 남자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는 한동안 주변 사람들을 살핀 뒤 말했다.
“강도윤.”
이안은 그 이름을 들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도윤의 외투 가슴에는 떼어 내다 만 통합도시 보안국 표식이 남아 있었다.
문해라가 아이를 가리켰다.
“저 아이는?”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제 딸은 아닙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니다.”
도윤은 자신이 업고 온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열 살쯤 되어 보였다. 오른쪽 다리에 거친 부목이 묶여 있었고, 의식은 없었다.
“이름을 모릅니다.”
문해라가 말했다.
“깨어나면 직접 묻지.”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이안에게 멈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봤다.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이안 기록삭제관.”
주변의 공기가 조용해졌다.
이안이 일어섰다.
“나를 압니까?”
도윤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 쪽으로 향했다. 무기는 없었지만 오랫동안 무기를 차고 다닌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통합도시 전체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미라가 이안 옆으로 다가왔다.
노바의 렌즈도 붉은 보안 표식을 분석했다.
문해라가 도윤과 이안 사이에 섰다.
“여기서는 이름 다음에 과거를 묻지 않는다.”
도윤이 차갑게 말했다.
“그 남자는 단순한 탈주자가 아닙니다.”
“너도 단순한 보안관은 아닌 것 같군.”
문해라가 대답했다.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문해라는 다시 나무판을 가리켰다.
“들어올 거면 네 이름으로 들어와. 도시 직책으로 들어오려면 돌아가고.”
도윤의 시선이 이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가슴의 보안국 표식을 뜯어 냈다.
금속 조각이 흙 위에 떨어졌다.
“강도윤입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직책이 없었다.
문해라는 길을 비켜 주었다.
“들어와.”
도윤은 의식 없는 아이를 다시 업었다.
이안을 지나칠 때 낮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도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안이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사람들이 질문하기 시작해서겠죠.”
도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질문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말에는 단순한 비난보다 깊은 피로가 담겨 있었다.
이안은 도윤의 등을 바라봤다.
통합도시 보안관.
도시에서 탈출한 사람.
이름 모를 아이를 업고 폐기구역까지 걸어온 남자.
그가 적인지, 동료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이제 누군가의 현재를 과거 기록만으로 결정하지 않으려 했다.
도윤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들어왔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골짜기에 아침 햇빛이 내려왔다.
사람들은 새로 온 이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줬다. 누가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묻지 않았고, 치료에 필요한 자원이 그들의 미래 가치보다 비싼지도 계산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아이는 가장 따뜻한 침상으로 옮겨졌다.
노바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도윤에게 다가갔다.
도윤은 처음에는 노바를 경계했지만, 이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쓸모가 없다고 판정된 존재들이 서로의 쓸모를 묻지 않고 움직였다.
어떤 사람은 물을 길었고, 어떤 사람은 불을 피웠다.
기억을 잃어 가는 사람은 새로 온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 외웠다.
팔이 없는 사람은 네 개의 기계팔로 부목을 고쳤다.
고장 난 돌봄 로봇은 이름 모를 아이의 맥박을 확인했다.
그리고 전직 기록삭제관은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려 애썼다.
도시에서는 가치가 숫자로 증명되어야 했다.
이곳에서는 한 존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먼저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그다음이었다.
그날 김이안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버려진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람을 쓸모로만 볼 수밖에 없게 된 도시가,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먼저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